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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대나무 숲에서 정의를 외치다

    [변상욱의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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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 그런 왕이 실제로 존재했을까? 신라 제 48대 왕 경문왕의 이야기이다. 1150년 전 경문왕은 헌안왕의 맏사위로 왕실에 들어갔다가 왕이 아들을 두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다. 쇠락해가는 신라 왕권의 강화와 개혁을 꾀했으나 기득권층인 진골 귀족의 모반, 지방토호의 반란에 시달리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를 끝냈다. 조선조 정조대왕과 비슷한 행로를 가졌다고 해야 할까? 그 딸이 진성여왕이고 황룡사 9층탑을 지은 왕이다.

    ◇ "내 귀가 당나귀 귀라고? 억울하오"

    삼국유사의 설화로는 "왕이 즉위하자 그의 귀가 갑자기 당나귀 귀처럼 길어졌다. 그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던 두건장이는 혼자만 끙끙대며 고민하다가 죽기 직전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크게 외친다. 대숲에 바람이 불 때마다 이 소리가 나자 왕은 대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게 했다"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가 이렇게 경문왕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한 시점은 경문왕 이후 경문왕 자손이 왕위를 이어가다 오리지널 신라 왕가인 박 씨로 왕의 성이 바뀐 신덕왕 때이다. 빼앗긴 왕권을 되찾은 박 씨 왕가의 폄훼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된다. 또 경문왕은 ''뱀과 함께 잠을 잤다''는 설화도 있는데 여기서 뱀은 경문왕이 기득권층을 배제하고 중용했던 신흥 세력인 화랑과 육두품으로 해석되고 있다(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각색한 선덕여왕과 미실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도록 했다는 구절은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그것은 당시 산수유가 약효가 좋은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던 걸 고려할 때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을 위한 구휼 작목이 아니었을까 라는 해석이 있다. 결국 대나무 숲과 임금님 귀 설화는 백성에게 인기 없는 왕의 이야기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 개혁에 나섰다가 기득권 토호 세력에게 배척당한 왕의 이야기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 21세기의 대나무 숲이 부르는 노래

    21세기 대한민국에 대나무 숲과 임금님 귀가 다시 이슈가 되고 있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온라인 공간에도 꾹 참고 가슴 속에 눌러 두었던 이야기를 쏟아놓는 ''대나무 숲''이 확산되고 있다.

    ''대나무 숲''에 모이는 이들은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하위직 샐러리맨 등 평소 사회의 부당하고 불평등한 구조에 대해 대놓고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대나무숲''의 시작은 ''출판사 옆 대나무숲(@bamboo97889)''이다. 출판업계 종사자라면 누구에게나 계정 비밀번호가 공개되고, 언제 어디서든 계정에 접속해 글을 남길 수 있다. 출판업계 종사자들은 그간 불합리하다고 느끼면서도 참아왔던 말들을 이 익명 계정에 마음껏 쏟아냈다.

    출판사 옆 대나무 숲에 이어 방송사, 촬영장, 디자인회사 대나무 숲이 생기더니 백수 옆 대나무, 시댁 옆 대나무 숲까지 등장했다. 고단한 하루를 간신히 넘기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속풀이, 넋두리, 하소연, 스트레스해소의 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갑''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거나 침묵해야 하는 ''을''들의 숲인 셈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단순한 익명의 게시판이 되는 것을 걱정도 한다. 또 악의적으로 남을 험담하고 비난하는 데 오용될 가능성도 있고, 재빠른 사람들이 광고글을 잔뜩 올려 게시판을 어지럽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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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나귀 귀라고 소리치면 울화가 풀릴까?

    그런데 그런 두건장이가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그토록 외치고 싶을까? 소리쳐 알리지 못하면 울화병에 걸릴까? 여기에는 우리가 함께 피해 갈 두 가지의 함정이 있다. 카타르시스에는 효과와 오류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흔히 이야기하는 울화를 참으면 병이 된다는 우리의 믿음이다. 화가 나고 분할 때 샌드백을 두들기고, 야구 배트를 휘두르고, 두더지 잡기 망치를 내리치면 우선 기분이 좋아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감정의 분출은 마음의 균형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고 설파한 카타르시스 효과이다. 프로이드 역시 울분은 물이 고이듯 고이고 구멍을 뚫어 빼내지 않으면 터져 나온다고 했으니 화는 풀어야 한다.

    이 주제를 놓고 1990년 대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 브래드부시먼이 이를 실험했다. 우선 학생들을 3 그룹으로 나누어 전혀 다르게 가르쳤다. 1) 분노를 풀어야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2) 분노를 푼다고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3)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달리 가르친 3그룹의 학생들에게 이후 강한 스트레스와 모욕을 줬더니 분노를 터뜨려야 건강한 거라고 학습한 학생들은 훨씬 더 공격적인 활동을 선택해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다.

    이어 2차 실험. 절반은 실험 전 샌드백을 마구 두들기고 잠시 대기, 다른 절반은 차분히 앉아서 대기한 뒤 게임을 시작했다. 자신에게 패한 상대에게 벌칙을 골라 주도록 하자 샌드백을 두들긴 학생들이 훨씬 가혹한 벌칙을 선택해 친구에게 가했다. 강한 감정 표출과 행동으로 얻은 카타르시스는 부정적 감정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가라앉혔다가 되살려 낼 뿐이고 습관적으로 강한 반응을 되풀이 하게 한다는 결과를 얻은 것이다.

    그러니 카타르시스를 통해 화를 풀려면 격렬한 행동보다는 전혀 공격성이 없는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산책, 음악 감상, 명상 등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도 된다. 울분을 터뜨려야 스트레스가 풀리고 평안을 되찾는다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누굴까?

    승려, 수녀들이다. 자연스런 욕구까지 철저히 통제하고 상하관계, 서열, 명령 체계, 처벌도 가장 엄격하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과는 현격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아예 공격적인 말, 행동, 그런 마음조차도 갖지 않도록 훈련하고 그런 성취를 얻는 때문이다. 이것이 카타르시스의 오류이다.

    [BestNocut_R]대나무 숲에서 솔직히 털어놓고 서로 위로하는 것은 좋지만 습관적으로 험한 말을 쏟아낸다면 잠시 후련해도 습관적으로 또 쏟아내야 하는 함정이 있다. 가능한 적절히 이용하고 과격한 언사가 일상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나무 숲이 없어지면 어떻게 할 건가?

    또 하나는 마치 군사정권 시절의 프로 야구장처럼 되어 버리면 그것도 곤란하다. 내 주변에 불만이 있고 차별이 있고 부조리가 있으면 똑바로 보고 일어나 함께 할 사람을 찾아 뭉치고 행동해야 한다.

    분노한 다음은 조직하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움직여야 세상이 바뀐다. 대나무 숲에 울분을 쏟아 놓은 걸로 세상 부조리에 대해 스트레스가 풀리고, 소리칠 만큼 소리치고, 대들만큼 대들었다고 여긴다면 스트레스가 끝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진보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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