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별 일호와 얼룩소 포스터
똑같은 태극마크를 달아도 인기종목인지 아닌지에 따라 세상의 관심이 달라진다. 비단 스포츠뿐만 아니라 콘텐츠 분야도 마찬가지다.
한국영화가 외화를 넘어서는 점유율로 경쟁력을 갖췄다면 한국 애니메이션은 그에 비해 갈 길이 멀다.
하지만 한편의 작품을 내놓기까지 이들이 흘리는 피와 땀은 다른 종목 선수들 못지않다. 오히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 길을 묵묵히 가야 한다는 점에서 더 많은 용기와 뚝심이 필요할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기획하고 제작한 '넛잡: 땅콩도둑들'이 북미 시장에서 의미 있는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한국인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역대 한국 애니메이션 최대 흥행작인 '마당을 나온 암탉'(2011) 이후 창작 애니메이션 감독들의 분투는 계속되고 있다. 자기만의 색깔을 확실히 갖춘 '돼지의 왕' '사이비'의 연상호 감독이 대표적이다.
20일 개봉하는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 작품은 단편 애니메이션계에서 두각을 드러낸 장형윤 감독의 첫 장편이다.
장 감독은 2008년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인디 애니박스: 셀마의 단백질 커피' 중 '무림일검의 사생활'로 제12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에서 일반단편부분 우수상, 제7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했다.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지난 5년간 최다 40-50명의 스태프가 5만 장의 작화로 완성한 작품으로 배우 유아인과 정유미가 주인공 남녀 목소리를 연기해 화제를 모았다.
두 배우가 영화 '깡철이'를 촬영하던 도중 바쁜 시간을 쪼개 적은 개런티에도 참여한 이유는 작품의 정서와 감독의 열정에 마음이 움직인 까닭이리라.
장 감독은 "한국적 드라마와 유머 등 우리의 정서가 가득 담긴 판타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었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다. 그림체 등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도 하나 작품 안을 들여다보면 한국적 정서나 색깔이 녹아 있다.
발사한지 20년이 지나 수명이 다한 인공위성 1호(우리별 일호)는 어느 날 누군가의 노랫소리를 듣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뮤지션을 꿈꾸는 경천은 오늘도 대학로에서 키보드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일호는 노래의 주인공을 만나보고 싶다는 열망에 지구로 향하고 두루마리 휴지처럼 생긴 마법사 멀린의 도움으로 소녀의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이곳 세상은 평화롭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나 검은 괴물이 호시탐탐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공략해 동물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의 간을 노리는 사냥꾼은 그렇게 변한 인간을 찾아내고 연탄난로처럼 생긴 소각자는 동물로 변한 인간을 삼켜버린다.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 보도스틸
영문도 모른 채 얼룩소로 변한 경천은 밤마다 사냥꾼과 소각자에게 쫒기다 마법사 멀린과 소녀 일호를 만나게 되고 이들과 티격태격하는 사이 잃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찾게 된다.
이 작품에는 곳곳에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숨어 있다. 화장실의 필수품인 두루마리 휴지로 만든 마법사나 어린 시절 학교에 자리 잡고 있던 연탄난로를 닮은 소각자 등 일상의 소품을 의인화한 기발한 캐릭터가 미소를 자아낸다.
걸쭉한 사투리가 우스꽝스런 흑돼지 북쪽마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과 수다스런 한국 아줌마를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얼룩소로 변한 경천이 뒤에 지퍼가 달린 인간 옷을 입고 짝사랑하는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상황이나 우주소년 아톰처럼 일호의 주먹이 발사돼 날아다니는 장면은 소소한 웃음을 자아낸다.
홍대 놀이터, 대학로 낙상공원,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동상 등 친숙한 공간은 이 영화가 우리시대 청춘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감정의 파고는 잔잔하나 뭉클함을 자아내는 순간도 있다. 작품을 관통하는 서정성은 순정적 감성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접한 정서나 한국적 색채가 녹아 있기에 변화 발전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관건은 스토리다. 캐릭터나 설정에는 재기가 넘치나 호흡 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주는 솜씨가 아직은 미숙하다. 좀 더 관객을 매혹시킬 이야기꾼으로 거듭나는 것이 이 재능 있는 신인 감독이 풀어야할 숙제로 보인다. 전체관람가, 81분, 20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