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존 케리 미국 국무부 장관이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한미외교장관회담을 마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윤창원기자
지난 18일 발효된 한미원자력협정 2년 연장을 위한 교환각서와 관련해 외교부가 영문본만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고 국문본은 아예 만들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조약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는 원칙과 국제외교에서 제고된 한국의 위상, 국민들의 알 권리 확보 모두에 역행하는 조치라는 지적이다.
23일 외교부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원자력의 민간이용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의 협력을 위한 협정의 연장을 위한 교환각서」는 국문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외교부 홈페이지에도 조약의 '국문본'이 아닌 영문본의 '번역본'만 게시돼 있다.
이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기존 협정을 2년 연장한다는 간단한 내용이라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며 "만약 동등한 효력을 가지는 국문본을 만들면 미측에서 그걸 검토하느라 시간이 더 걸리는 등 효율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고 해명했다.
언어가 상충되는 다자 간 조약에서는 특정 언어로 된 문서가 효력을 가지는 경우는 있지만, 양자 간 조약에서 영문본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한국 외교에 대한 대국민 투명성이 요구되는 분위기에서, 동일한 효력을 가지는 국문본 작성은 관례화되는 추세였다. 한미FTA 체결 당시 번역 오류가 이슈화됐던 것도 이런 움직임에 한 몫했다.
외교부의 주장처럼 "단순한 내용"이라고 해도, 이렇게 체결된 조약이 국내 법률과 같은 효력을 가지는 것을 감안하면 안일한 접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외교부 수장인 윤병세 장관이 여러 자리에서 이용하는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문구와도 상충되는 태도다.
'내용이 단순하다' 여부를 외교부가 정할 게 아니라 국민들이 판단하는 게 맞는데, 외교부가 일반 국민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행정을 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미 양측이 이미 지난 해 4월 원자력협정을 2년 연장하기로 합의했으므로 국문본을 작성하는데 시간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외교관계가 복잡해지는 것도 아니다"라며 "외교부가 국민들을 생각하는 조약정책을 펴지 않았고 직무유기를 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RELNEWS:right}
'국민들에 대한 설명'에 인색한 정부의 이같은 행태는 최근 원자력방호법 논란과도 닮은 꼴이다. 국민보다는 박 대통령의 외부 일정이나 상대국과의 관계 편의에 더 비중을 둔 모습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정홍원 국무총리가 직접 나서 밀어붙이고 있는 원자력방호법의 경우, 2012년 8월에 법안이 제출됐다. 시간이 많았지만, 지난 2월 당정청의 중점처리법안에도 포함되지 않다가 박 대통령의 핵안보정상회의 일정 전 갑자기 '통과안되면 나라 망신'이라며 이슈화됐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박주선 의원(무소속)은 "박근혜 정부의 외교에는 '한복 외교'는 있지만 '한글 외교', '국민이 우선인 외교'는 실종됐다"며 "외국에 어떤 모습으로 비치느냐만 신경 쓸 게 아니라, 국민에게 하나라도 더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