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을 면하고 처녀분으로 남은 '무령왕릉' 자태를 보이다
현재의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제1호분부터 6호분까지 일제에 의해 파헤쳐졌다. 유일하게 온전한 자태가 남은 무령왕릉은 졸속으로 발굴되었다. (사진=공주시 제공)
# 장면 1
"어~ 이게 뭐지?"
일본인 교사 카루베가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제6호분을 파헤친 후 39년이 지난 1971년 7월 5일 6호분의 뒷산.
배수로를 파던 인부의 삽에 뭔가 단단한 물체가 부딪쳤다.
그것은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이었다.
조금씩 파내려가 보니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카루베가 죄다 도굴해버린 6호분은 벽면 사방에 사신도만 남고 도굴되는 과정에서 천장이 훼손돼 물이 스며들었다.
또 여름만 되면 무덤 안과 밖의 기온 차이로 이슬이 생겨 벽화가 훼손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해 여름부터 배수로를 만들기 위해 뒤쪽 언덕을 파내려가게 되었다.
그러다 인부의 삽날에 왕릉 입구의 전돌이 걸린 것이다.
인부들은 서둘러 공사 책임자인 김영배 국립공주박물관장을 찾았다.
# 장면 2
김영배 관장은 이날 새벽에 기이한 꿈을 꾸었다.
돼지인지 해태인지 모를 괴상하게 생긴 짐승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꿈이었다.
'무슨 짐승일까?'
이 꿈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공사현장에서 점점 파내려가니 벽돌로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다음날까지 흙을 파헤치니 이 구조물이 6호분이 아닌 또 다른 무덤의 입구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백제무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공사가 중단되고 서둘러 문화재관리국에 신고를 했다.
# 장면 3
보고를 받은 문공부장관은 김원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는 발굴단을 파견했다.
7월 7일 오후에 현장에 도착한 발굴단원들은 벽돌로 쌓은 구조물이 또다른 전실묘의 입구란 것을 확인했다.
1442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무령왕릉 입구.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러나 이날 밤 큰 비가 내리면서 쏟아지는 빗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배수구 설치공사를 밤 늦게까지 벌였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 무덤의 문을 열기로 하고 철수했다.
이때만 해도 발굴단은 무덤은 맞지만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 '무령왕릉'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백제고분은 신라고분과는 달리 출입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열이면 열 모두 도굴됐기 때문이다.
또 이번 발굴작업이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참사로 끝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수라장이 된 발굴현장 7월 8일 어떻게 알았는지 조간신문인 한국일보가 공주에서 왕릉을 발견했다는 특종보도를 냈다.
이 바람에 보도진과 구경꾼들이 꾸역꾸역 송산리로 몰려들었다.
발굴단은 아침 8시쯤부터 인부를 투입해 무덤 입구로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오후 3시쯤 무덤 입구가 나타났다.
발굴단은 일단 막걸리와 수박,북어를 올려놓고 위령제를 지냈다.
이어 김원용과 김영배는 막아놓은 부분의 맨 위 벽돌 2개를 들어냈다.
그 순간 무덤에서 하얀 수증기가 새어나왔다.
1,400년 이상을 밀폐상태로 갇혀 있던 찬 공기가 바깥의 더운 공기를 만나 흰 수증기로 변한 것이다.
무령왕릉의 문을 열자 나타난 장면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마침내 무덤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무덤이 조성된 뒤 한번도 개봉되지 않은 처녀분을 만난 것이다.
김영배는 꿈에 본 멧돼지처럼 생긴 돌짐승을 보고 크게 놀랐고, 김원룡은 입구에 놓인 무령왕의 지석을 보고 놀랐다.
'석수'라고 불리는 돌짐승은 악귀를 쫒아 죽은 이를 지키는 일종의 수호신이다.
지석은 왕릉 주인공의 신원과 조성 연도 등을 새긴 돌이다.
수많은 왕릉이 발굴되고 도굴되었지만 그 무덤이 어느 왕의 무덤인지를 확실한 기록과 유물로 알려준 것은 무령왕릉이 처음이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좌)과 석수.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때부터 발굴 책임자들을 시작으로 다들 흥분하면서 이성을 잃었다.
무덤에 들어간 지 20분 후에 두 사람이 나와 무령왕릉 발견 사실을 발표했다.
발굴 현장은 집단 패닉에 빠졌다.
보도진들이 앞다투어 들어가려고 하자, 유물 훼손을 막기 위해 한 언론사당 서너컷만 찍기로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심지어 무덤 안에 함부로 들어가 촬영하다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불상사도 일어나고, 뒤늦게 도착한 모 신문사 기자는 자기네 회사에 연락이 늦었다며 문화재관리국 과장의 뺨을 때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구경꾼을 통제해야 할 경찰들마저 "나도 한번 구경해보자"며 대열의 앞장에 섰다고 한다.
이런 중요한 유물이 발굴되면 경찰의 협조를 받아 철조망을 둘러쳐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충분한 장비를 갖춘 뒤 몇달이고 몇년이고 눌러 앉아 연구를 했어야 했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 안쪽에서 발굴단은 긴급 회의를 가진 끝에 사고 방지를 위해 신속하게 발굴을 끝내기로 했다.
있을 수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17시간만에 끝난 무령왕릉 발굴...천추의 한으로 남다
날림공사 하듯이 하룻밤만에 끝낸 발굴작업.
발굴단은 급조된 발전기로 마련한 전등 2개를 갖고 철야작업에 들어갔다.
조사팀을 2개로 나눠 한 팀은 왕 쪽을, 다른 팀은 왕비 쪽을 맡아 사진 촬영과 실측 작업을 벌였다.
속전속결로 진행한 작업은 밤 10시쯤 마무리됐다고 하니 이건 그냥 통에다 유물을 쓸어담은 셈이다.
자정쯤부터 유물을 밖으로 반출하기 시작해 다음날 아침 9시경 바닥 청소까지 끝냈다.
처음 무덤에 들어간 지 17시간만에 모든 조사와 유물 수습을 끝내는 기네스북 기록을 남겼다.
◈발굴 이후의 혼란…
이 혼란의 와중에 김영배 관장은 몰래 중요 유물을 상자에 넣어 고속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갔다.
일종의 충성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은팔찌 같은 걸 휘어보고 해서 다들 기겁을 했다고 한다.
김 관장은 유물을 갖고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공주로 돌아왔다.
국보급 유물을 운송 차량이나 호위 없이 상자에 넣어 고속버스로 이동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한편 대통령이 유물을 갖고 노는 것을 TV로 본 공주시민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공주서 출토된 유물은 우리 고장의 소중한 재산인데 멋대로 서울로 가져가다니..."
주민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유물의 서울 반출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급하게 내려온 허련 문화재관리국장과 김원용이 주민 대표들과 협상을 벌여 이렇게 합의를 봤다.
1.공주에 무령왕릉 출토물을 전시할 박물관을 짓는다.
2.그전에 유물의 보존 처리와 보고서 작성을 위해 임시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송한다.
이렇게 해서 무령왕릉 유물보존을 위한 국립공주박물관이 다음해 준공됐다.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무령왕릉 유물들 (사진=국립공주박물관 제공)
◈2천여점의 유물 서울로 이송‥…끊이지 않는 저주7월 16일 새벽 무장경관들의 호위 속에 유물을 실은 차가 공주를 떠났다.
차량들이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다 출발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문화재관리국장 차량의 운전기사가 넘어졌는데 공교롭게도 엉덩이 정맥이 터져 운전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단 유물차량과 호송차량이 먼저 출발했다.
이번에는 모 신문기자에게 뺨을 맞은 장인기 문화재관리국 과장의 지프차 운전기사가 동대문 근처에서 어린애를 다치게 하는 사고를 냈다.
다음해 서울대로 복귀한 김원룡 교수는 어쩌다가 빚더미를 떠안아 살던 집을 처분해야 했다.
고고학계에서는 큰 무덤,즉 왕릉을 파면 액이 따른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이렇게 해서 고대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수많은 정보가 엉터리 발굴 과정에서 영원히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발굴 작업에 참가했던 고고학자 조유전 씨는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남겼다.
"무령왕릉 발굴은 고고학 발굴사에서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보도진들의 현장공개 독촉과 공주읍민 등 현장에 몰려든 일반인들의 이상 열기, 경비에 자신이 없었던 공주경찰서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현장의 분위기는 어떤 거대한 힘에 떠밀리듯 통제 범위를 벗어나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무엇보다 체계적인 준비없이 왕릉 발굴을 하룻밤만에 해치운 일은 씻을 수 없는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