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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을 앞세우고 약탈해간 경천사십층석탑
부소산 경천사 터에 있던 경천사십층석탑. 일본인 세기노 다다시가 쓴 <한국건축조사보고>에 실린 사진이다.(사진=눌와 제공)한국건축조사보고>
조선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뺏긴 후 2년이 지난 1907년 3월.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총칼을 들고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부소산 기슭에 있는 경천사 절터로 몰려왔다.
이 당시에는 사찰의 건물은 다 사라지고 특이한 형태의 대리석 석탑 하나만 우뚝 서있었다.
13.5m의 큰 키에 탑신마다 섬세하게 조각된 불상과 보살상은 화초들로 뒤덮여 있었지만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석탑을 마구 해체하고 포장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인근 주민들과 군수 일행이 가로막자 '고종 황제가 하사했다'는 거짓말을 내세워 총검으로 위협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달구지 수십대에 석탑 조각들을 싣고 개성역으로 빼돌린 뒤 일본으로 실어갔다.
어떻게 해서 백주대낮에 이런 날강도짓이 벌어진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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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석탑을 탐내 사기극을 벌인 다나카 미쓰아키다나카 미쓰아키는 일본의 궁내대신으로 문화재 약탈자 가운데 최고 악질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904년에 발간된 <한국건축조사보고>라는 책에서 본 경천사십층석탑에 흠뻑 빠졌다.
높은 탑이지만 위압감보다는 상승과 안정의 느낌을 주면서 균형감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회색 대리석 탑이었다.
그는 자나깨나 이 탑을 자기 집 정원에 갖다 놓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1907년 1월 24일에 열린 대한제국 황태자(순종)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집어갈 방법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그냥 돌아갔다.
그러다 뒷돈을 주고 무뢰배들을 고용해 명령을 내렸다.
"고종황제가 결혼식 기념으로 나에게 하사했다. 개성 근처의 절터에 있는 대리석탑을 도쿄에 있는 우리 집 정원으로 가져와라"
그래서 이같은 문화재 약탈과 야반도주라는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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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끓는 여론...야만적인 약탈을 준엄히 꾸짖은 푸른 눈의 외국인들황제의 이름을 팔아 문화재를 훔쳐간 이 사기행각은 순식간에 한양으로 전해져, 신문을 발행하고 있던 젊은 영국인의 귀에 들어갔다.
바로 35세의 언론인 어네스트 베셀이다.
누구보다도 조선을 사랑했던 베셀. 석탑을 돌려받기 위해 용기있게 정론을 펼쳤다.(사진=눌와 제공)
베셀은 영국 특파원으로 조선에 왔다가 이 쓰러져가는 나라를 돕기 위해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뉴스="">라는 일간지 2개를 발간하고 있었다.
그는 통감부의 매수와 회유를 뿌리치고 이 전대미문의 문화재 약탈 소식을 신문에 실었다.
1907년 3월 12자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다.
"개성군과 풍덕군 접경지역에 있는 경천사탑은 고려 공민왕 때 공주를 위해 옥석(대리석)으로 10층 높이로 세운 수백년된 유물이다. 그런데 무슨 허가를 받았는지, 일본인들이 그 탑을 무너뜨려 일본으로 실어간다 하기에 두 군민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빼앗기지 않겠다고 결사적으로 맹세했다고 한다"
이렇게 군민들은 맨 손으로 우리 유물들을 지키려고 했지만, 이 사정을 알고 있는 중앙 조정은 남의 일처럼 바라봤으니 정말 참담한 일이었다.
다나카가 잠시 조선에 왔을 때 심상훈 궁내대신에게 이 탑이 탐난다고 말하자, 조선의 대신이라는 인물이 "탐이 나거든 가지고 가시지요"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베셀이 연일 이 사건을 보도하자, 통감부가 지원하는 <서울프레스>와 일본 정부의 대변지인 <저팬 메일="">은 '이것은 분명한 거짓말'이라고 반박해 일대 논전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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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양심에 호소한 선교사 헐버트
1920년대 미국 뉴욕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강연을 했을 때의 호머 헐버트
서울에서 <코리아 리뷰="">라는 월간지를 발행하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이 소식을 접하자 피가 끓어 올랐다.
그는 1905년 일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하기 위해 워싱톤에 다녀오기도 했고, 1907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도 밀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헐버트는 일본 고베의 영자신문 <저팬 크로니클="">과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신문인 <뉴욕 포스트="">에 이 사실을 알려 대대적으로 보도하도록 했다.
이처럼 국내외의 여론이 들끓자 일본 정부는 더 이상 석탑 약탈을 없는 사실이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양심적인 일본인들도 나서 다나카를 질타하고 조선으로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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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조선총감부...버티는 다나카여론이 악화되자 당시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다나카는 실어간 석탑을 조선의 원래 위치로 돌려보내라. 그것은 불법적인 반출이다"라고 요구했다.
데라우치가 양심적인 인물이라 그런 게 아니고 곧 조선을 병탄해야 하는데 반일감정이 고조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초대 총독으로 올라서는 데라우치는 조선의 유물 반출을 엄금했는데, 이는 조선이 억년만년 일본 땅이 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그도 조선을 떠날 때 석굴암 본존불을 반출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다나카는 귀를 막고 11년동안 버텼다.
1918년 결국 국내외 여론의 단합과 계속되는 총독부의 반환 요구에 무릎을 꿇고 탑을 경성으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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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간 방치된 경천사십층석탑...경복궁에 다시 서다
경복궁 뜰에 서있는 경천사십층석탑. 1995년까지 전통공예관 앞에 세워져 있었다.(사진=사진작가 김성철 제공)
우여곡절 끝에 경천사십층석탑은 현해탄을 건너 고국에 돌아왔지만 심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애써 찾아오고도 해방 때까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다.
결국 세월이 흐른 뒤 1959년 경복궁 내 전통공예관(현재의 경복궁 관리사무소) 앞에 세워졌다.
3년 후에는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복구기술이 낙후해서 조잡스럽게 복원되었다.
일부 훼손된 부분을 시멘트로 칠하고,야외에 세워놓으니 산성비나 풍화작용에 의해 계속 망가져갔다.
결국 1995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석탑을 해체한 뒤 10년간 보존.복원작업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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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의 넓은 홀에 위용을 드러내다
2005년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긴 경천사십층석탑.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서면 넓은 홀의 맨 끝에 있는 아름다운 대리석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늘씬하게 솟아 올라간 몸매와 독특한 생김새, 탑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 등 늘 볼 때마다 그 우아한 멋에 감탄하게 된다.
이 탑이 세워진 것은 1348년 고려 때이다.
생김새도 특이하지만 '병을 치유해주는 약황탑'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팔작지붕의 기와집들이 빼곡하게 마을을 이룬 듯 보이는 걸작이다.
이 수려한 탑을 보고 지나가는 저 어린이들이 이 탑을 지키려고 맨 몸으로 총칼에 덤빈 군수와 군민들, 이 척박한 나라를 사랑했던 푸른 눈의 외국인들을 기억할까?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했던 베셀과 헐버트의 유해는 유언대로 고국에 가지 않고, 합정동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묻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뉴욕>저팬>코리아>저팬>서울프레스>코리아>대한매일신보>한국건축조사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