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 경매에 나온 조선 왕비의 금보 지난 4월 중순 인사동 길을 걷던 혜문 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은 벽에 붙어 있는 한 장의 포스터를 보고 경악했다.
이 포스터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하던 왕비의 도장인 '금보'(금으로 만든 어보)를 경매한다는 내용이었다.
인사동 공회랑에서 새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조선 성종의 왕비 금보 (사진=문화재제자리찾기 제공)
이 금보는 조선의 제9대 국왕인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에게 올린 어보로, 상부에는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가 조각돼 있고,바닥면에는 왕후의 존호가 새겨져 있다.
경매를 주관하는 마이아트옥션은 국내의 한 소장가가 1987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8만 달러를 주고 산 물건이라고 설명했다.
"아무리 어지러운 사회라지만 일국의 왕비가 쓰던 옥새가 백주대낮에 수도 서울에서 거래될 수 있나?"
분노한 혜문 스님은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함께 법원에 경매 처분을 중단하라는 가처분을 신청하는 등 어보 환수 운동에 나섰다.
다행히 취지에 공감한 문화유산신탁이 경매에서 4억 6천만원에 낙찰받아 모든 어보를 보관하고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 무상으로 기증하기로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건가?
◈미군 사병은 약탈해가고,대통령과 정부는 돌려주기 바쁘고...
세월이 흘러도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어보. 조선왕실의 풍채와 위엄의 상징이다.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시대에는 왕권과 왕실을 상징하는 인장으로 국가의 각종 의례에서 행사의 주인공에게 올렸던 '의례용 어보'와 실제로 사용했던 '행정용 국새'를 특별히 제작했다.
의례용 어보는 호칭을 새기는 인면과 사면체로 된 몸체,손잡이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어보의 각 부분별 명칭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 초기부터 대한제국 때까지 만들어진 어보는 최상 품질의 금이나 옥으로 제작하고,아름다운 용이나 거북 모양으로 손잡이를 장식해 예술품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그 아름다움 때문에 외국군대의 약탈 대상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 전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어보는 모두 368과이다.
이 가운데 41과가 일제강점과 8.15 해방,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다 최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오는 25~26일 한국을 방문할 때 어보와 국새 8점이란 '선물꾸러미'를 들고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국민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으로 불법 반출된 조선왕실의 어보와 국새 중 오바마 대통령 방한 때 돌려받게 될 인장들 9과. 왼쪽 위에 있는 어보가 바로 대한제국 선포를 계기로 제작된 '수강태황제보'이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이들 어보와 옥새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해병대 장교가 불법 반출한 것을 후손이 경매에 내놓았다가 정보를 입수한 국토안보부 수사국에 의해 압수됐다.
결국 미군 병사가 훔쳐간 보물을 미국의 대통령이 직접 반환하는 희한한 장면을 보는 셈이다.
앞으로도 속속 나타나겠지만, 없어진 조선왕실의 어보와 국새는 대부분 6.25 전쟁의 혼란통에 미군 사병들이 한국전 참전 '기념품'으로 훔쳐간 것이다.
철종 때까지의 인장들은 종묘에,이번에 돌려받는 고종의 황제지보는 집무실이 있던 덕수궁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 두개의 건물을 접수해 주둔했던 미군들이 인장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한 것으로 알려졌다.
◈집요한 추적 끝에 찾아낸 '문정왕후 어보'
문정왕후 어보.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금장도장이다. (사진=문화재제자리찾기 제공)
"드디어 찾았다~"
지난 2009년 미국 메릴랜드 국립문서보관소.
혜문 스님과 김정광 미주한국불교문화원장은 쾌재를 불렀다.
이 곳에서 발견한 국무부 문서 '아델리아 홀 레코드'에 조선왕실의 어보 47과가 미군에 의해 약탈당한 사실과 LA카운티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문정왕후 어보가 미군이 종묘에서 훔쳐간 유물이란 사실이 기재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군의 한국 문화재 약탈 현황'이란 국무부 자료가 결정적이었다.
이 문서를 근거로 두 사람은 각각 한국과 미국에서 반환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문정왕후 금보 반환운동 포스터
백악관 등 미국 관계요로에 어보 반환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고, 박물관 측에 이 유물이 미군에 의해 약탈된 사실과 반환해야 하는 당위성을 계속 설득했다.
급기야는 지난해 8월 100인 위원회를 구성해 백악관 사이트에 10만명이 서명하는 '응답하라~ 오바마' 작전까지 벌였다.
한달이란 기간 안에 10만명이 서명하면 대통령이 공식 답변을 내놓아야 하는 제도를 활용한 것이다.
결국 지난 4월 LA카운티박물관은 문정왕후 어보를 한국정부에 조건없이 반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오바마 대통령이 62년전 태평양을 건너간 어보와 국새 9과를 들고 방한하게 된 것이다.
◈한국과 미국 사법당국이 합작해 제 자리로 돌려놓은 '호조태환권 인쇄원판'
호조태환권 인쇄원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화폐를 찍은 인쇄판이다.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화폐인 '호조태환권' (사진=풍산화동양행 제공)
지난해 9월 3일 대검찰청 대회의실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빼돌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화폐 인쇄원판 '호조태환권'을 한국정부에 돌려주는 전달식이 열린 것이다.
호조태환권은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면서 구화폐를 회수하기 위해 고종 30년(1893년)에 발행한 교환표이다.
50냥.20냥.10냥.5냥 등 4종의 원판이 제작됐고, 이중 10냥짜리 원판이 태평양을 건너갔다가 62년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이 인쇄원판을 훔쳐간 미군의 유족들은 지난 2010년 4월 경매회사에 이 원판을 포함한 한국 골동품 다수의 경매를 의뢰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주미한국대사관 이종철 법무협력관은 '전쟁 중 해외 문화재 반출과 거래는 불법'이라며 경매 중지를 요청했다.
유족 측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따라 한국대사관은 한국 정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미국 국토안보부와 법무부에 수사를 의뢰했다.
미국 사법당국은 이 문화재가 불법 유출된 사실을 확인한 후 인쇄원판을 경락한 재미교포와 경매회사 대표를 체포하고, 인쇄원판은 몰수해 한국 정부에 돌려보냈다.
지난 2월 15일 호조태환권이 경매시장에 나왔다.
이 화폐는 구 한말 화폐개혁이 실패로 끝나자 대부분 소각돼 희귀한 지폐가 되었다.
몇 차례 열린 경매에서 8천만~9천여만원 정도의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반면 이 지폐를 찍어내던 호조태환권 원판은 재미교포가 3만 5천달러(약 3,900만원)를 주고 샀다가 체포되고 압수를 당했다.
정말 기구한 운명의 화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