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 이레째인 22일 오전 전남 진도항으로 구조대원들이 수습된 시신들을 운구하고 있다. 윤성호기자
숨진 학생들이 한꺼번에 발견되면서 초기 구조 실패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배어나오고 있다.
특히 수습된 상당수 시신에서 손가락이 골절된 것으로 드러나 선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친 흔적으로 보인다.
민관군합동구조팀은 지난 21일과 22일 이틀 동안 3층 식당과 4층 선실 등에 대한 구조.수색에 나서 주검 70구를 수습했다.
특히 23일 오전에만 4층 선미 부분에서 많은 시신이 수습되는 등 사망자가 150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날 오전 발견된 시신 22구는 주로 학생들이었으며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
수색 작업에 참여했던 한 민간 잠수부는 “수습된 시신들의 손가락 상태가 엉망이었고 손가락이 골절된 시신이 많았다”고 말했다.
문틈으로라도 손가락을 넣어 문을 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다 생긴 골절이라는 설명이다.
골절을 전문으로 하는 한의사는 “시신들의 손가락이 골절됐다면 선실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다 부러진 것 같다”면서 “얼마나 공포감 속에 고통을 겪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누군가 선실의 유리창만 깨뜨렸다면 밧줄을 이용하지 않고서도 그들을 배 밖으로 나오게 했을 것이다.
구명조끼를 입고 선실에 있던 학생들을 배 밖으로 꺼내기만 하면 주변에 있던 어선들에 의해 바로 구조됐을 것이다.
당시 사고 해역의 해수 온도는 15도 정도였다.
전문가들은 이 정도의 수온이라면 조난자들이 구명조끼를 입은 상태에서 두시간 이상 저체온증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한다.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의 위치를 알려주는 부표가 22일 오후 전남 진도군 앞 바다에 떠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만약 해경과 해군의 최초 구조작업이 배 밖으로 나와 있는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과 어른들 구조에 집중하기 보다는 선실에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 위주로 이뤄졌다면 손가락이 부러진 시신은 크게 줄었고, 그들 중 상당수는 구조됐을 것이다.
그러나 해경의 초동 구조는 선체에 진입해 구조작업을 벌이거나 물에 잠기지 않은 선실의 유리창을 깨는 등의 적극적인 구조활동은 이뤄지지 않았고 단지 배 밖으로 나와 있는, 보이는 승객들을 구조하는데 그쳤다.
초동 출동 당시 승객들에 대한 상황파악이 안됐거나 현장 구조전문가가 초동 구조대에 포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해경은 세월호의 신고도 늦었고 출동도 더뎠기 때문에 갑판이나 선실 밖으로 나온 승객들 구조하기에도 바빴다고 해명할지 모른다.
해경 헬기는 구조용 바구니를 이용해 한 명씩 헬기로 들어 올리는 방식이어서 짧은 시간에 대량 구조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현장에 파견된 해경 구조대원들이 승객들을 구조용 바구니에 태우는 일을 돕는데 치중했으니 선실 접근이나 선실의 유리창을 깨고 구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을지 모른다.
해경 구조대가 헬기 구조와 배 승선을 돕는데 심혈을 기울이지 않고 물에 완전히 잠기지 않은 선실의 3층과 4층, 5층의 유리창을 깨고 선내에 진입했다면 구조 인원은 174명보다 훨씬 늘었을 것이다.
해경 구조대가 세월호에 도착해 첫 구조작업을 할 때부터 세월호가 90% 이상 물 속에 잠긴 10시 30분쯤까지 60분의 시간, 구조의 황금시간대였다.
실제로 해경 산하의 진도해상교통관제센터(VTS)는 세월호와 교신하면서 학생을 포함해 450-500명가량이 승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 받았다.
해경도 많은 학생들이 타고 있었음을 알았을 텐데 정작 그들을 위한 공격적인 구조에는 미치지 못했다.
(사진=해경 제공)
실제로 구조에 참여한 한 민간인은 “배가 엄청 큰데도 구조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배가 침몰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경황이 없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해경 구조대의 일부만이라도 손도끼로 학생들이 대거 머물던 4층 선실의 유리창을 마구 깨뜨렸다면 어땠을까?
너무도 진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강원도 동해시에서 문어를 잡는다는 한 잠수부는 “텔레비젼을 보니 선실의 유리창이 보이던데 왜 유리창을 깨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