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토종 호랑이와 같은 종인 시베리아 호랑이. 남한에서는 멸종됐고, 북한에 몇 마리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시베리아와 중국에 250마리 정도가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서울대공원 동물원 제공)
◈일본의 갑부, 조선에서 사냥한 호랑이의 고기를 VIP에게 대접하다
일본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열린 조선 호랑이 고기 시식회 (사진=에이도스 제공)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후 7년이 지난 1917년 12월 20일 도쿄의 제국호텔.
사업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의 초대를 받아 모인 200여명의 손님들은 메뉴판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1.함경남도 호랑이의 차가운 고기 (푹 익히고 토마토 케첩을 곁들임)
2.영흥 기러기 스프
3.부산도미 양주 찜(야채를 곁들임)
4.고원 멧돼지구이(크랜베리 소스와 샐러드 곁들임)
5.아이스크림(작은 과자 곁들임)
6.과일과 커피
다들 정신없이 먹고 있는 와중에 야마모토가 마이크를 잡았다.
"전국시대의 무장은 진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조선의 호랑이를 잡았습니다.
다이쇼 시대의 저희들은 일본 영토 안에서 호랑이를 잡아왔습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를 침입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호랑이를 잡은 이야기를 자기 땅이 된 조선에서 자유롭게 사냥한 자기와 비교한 연설이다.
이 돈 많은 사업가는 어떻게 해서 조선의 호랑이를 잡았나?
◈야마모토, 150여명을 동원해 조선에서 활개치다
호랑이 사냥 원정대에 소속된 조선 포수 최순원과 백운학이 각각 잡은 호랑이. 뒤에 서있는 카이젤 수염을 한 인물이 바로 야마모토이다. (사진=에이도스 제공)
조선과 달리 일본에는 야생 호랑이가 단 한 마리도 살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호랑이 사냥은 무사의 용맹성을 과시하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선박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야마모토는 많은 돈을 써서라도 명예나 이름을 높이고 싶었다.
더군다나 알아보니 조선총독부도 최대한 지원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1917년 11월 10일 도쿄역을 출발해 딱 한달동안 150여명을 동원해 조선 산천을 뒤지면서 떠들썩하게 사냥 여행을 다녔다.
이번 여행에서는 조선의 최고 포수 21명과 일본인 포수 3명이 가담해 8개조로 나뉘어 함경남북도와 금강산, 전라남도에서 사냥을 벌였다.
사방에서 모집한 포수들 (사진=에이도스 제공)
그가 남긴 사냥일지를 책으로 엮은 <정호기>(에이도스 간)를 보면,
"조선 제일의 호랑이 사냥꾼 백운학과 사냥꾼 3명은 오후 4시에 함경북도 성진에 있는 남운령에 도착했다.
이들은 산 정상에서 갈라섰다.
산에는 인적이 거의 없었다.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몰이꾼 십여명이 산 밑에서 호랑이 몰이를 시작했다.
갑자기 산허리 나무숲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예상대로 호랑이는 산 정상을 향해 질주하려고 했다.
백운학은 호랑이와 40보 정도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소총 세 발을 연달아 쏘아 호랑이 숨통을 끊어놓았다"
이어 함경남도 단천의 호랑이굴에서 두번째 호랑이를 사살했다.
함경남도 영흥에서는 2.1m 길이의 표범을 잡았다.
영흥에서 사살된 표범 (사진=에이도스 제공)
특이하게 전남 천태산에서 호랑이와 표범의 혼혈인 '수호'라는 맹수가 잡혔다.
수호는 100년에 한 마리 나올까 말까 하는 희귀한 동물로, 사진을 보면 꼬리가 표범보다 더 굵고 길다.
수호를 잡은 사냥꾼들이 능주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한 몰이꾼은 수호에게 머리를 물려 붕대를 감고 있다. (사진=에이도스 제공)
이렇게 잡은 포획물은 기차 화물칸 한 칸을 가득 채웠다.
정리해보면, 호랑이 두 마리, 표범과 수호, 곰 각각 한 마리, 멧돼지 세 마리, 산양 다섯 마리, 늑대 한 마리, 노루 아홉 마리, 다수의 기러기와 청둥오리, 꿩이 있었다.
각 언론은 이번 사냥은 대성공이라고 보도했고, 야마모토는 으시대며 다녔다.
사냥꾼들은 원산으로 집결해 포획물을 여관 뒷마당에 쌓아 놓았다. (사진=에이도스 제공)
◈야마모토, 모교인 교토의 도시샤 고등학교에 호랑이와 표범 잔해를 기증하다
도시샤 고등학교 표본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호랑이 박제 (사진=에이도스 제공)
같은 표본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표범 박제 (사진=에이도스 제공)
야마모토는 호랑이 두 마리의 고기는 다 먹어 치웠으나,모피 등 다른 잔해는 모교인 도시샤 고등학교에 기증했다.
표범 한 마리와 수호도 같이 기증했다.
호랑이 두 마리 모두 중간 크기로 젊은 호랑이다.
표범은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으나 어느 것이 호랑이와의 혼혈이라는 기록은 없다.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이 언제나 올까?
◈남한에서 자취를 감춘 토종 호랑이와 표범
이리 보고 저리 보는 호랑이 ('호작도' 기획전 도록에서)
한반도에는 호랑이가 많이 살아 이와 관련된 설화 ,전설, 속담들이 아주 많다.
대표적인 민중예술인 민화에서도 호랑이는 소재로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면 그 많던 호랑이는 다 어디 갔나?
가장 많이 포획된 시기는 일제시대였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통계연표를 보면, 1919년부터 23년간 호랑이 97마리, 표범은 무려 624마리나 잡은 것로 기록돼 있다.
일제 강점기가 36년이니 통계에 잡히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실제 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전쟁이 터지고 경제개발이 가속화되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 호랑이와 표범은 언제 나타났나?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마지막으로 잡힌 조선 호랑이와 일본 순사 미야케 요로우. (사진=엔도 키미오 제공)
1921년 10월 추석을 앞두고 경주 대덕산에서 나무를 베던 주민이 호랑이의 습격을 받고 주재소에 신고했다.
마침 일본 왕실의 귀족이 경주를 방문할 예정이어서 주재소는 비상이 걸렸다.
이 기회에 공을 세우자고 나선 미야케 요로우 순사는 길닦기 공사 중이던 조선인들을 몰이꾼으로 동원해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이후 지금까지 93년간 남한에서 호랑이가 나타난 적이 없다.
북한에서는 지난 1993년 자강도 낭림산에서 호랑이 일가족 3마리가 생포되었다.
이 가운데 한 마리가 1999년 1월 서울대공원에 반입되었다.
오도산에서 잡혀 창경원에 전시된 한국 표범. 12년 뒤 폐사했다.(사진=서울대공원 동물원 제공)
토종 표범은 1962년 2월 경남 합천에 있는 오도산에서 마지막으로 잡힌 후 자취를 감췄다.
이 표범은 마을 주민 황홍갑 씨가 설치한 올무에 허리가 걸려 생포되었다.
생전에 황홍갑 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표범이 시뻘건 입을 벌리고 송곳니를 드러내긴 했지만 도망가지는 못했지.
배가 꽉 조여서 그런지 표범 소리가 마치 비명 같더라고...
'캬~, 캬악~ 하는 게 말이지"
이 표범은 드럼통에 갇혀 있다가 한달 후 창경원으로 팔려갔다.
합천에서 진주로 오려면 넘어가야 하는 방아재에서 1960년에 잡은 토종 표범 사진. 표범은 선명한 매화무늬를 갖고 있어 줄무늬인 호랑이하고 확연히 구분된다. (사진=노덕제 진주시 축구협회 심판위원 제공)
오도산 표범이 잡히기 2년 전인 1960년.
위 사진을 언론에 공개한 노덕제 씨의 부친인 노종생 씨는 호랑이(사실은 표범)의 출몰로 골머리를 앓던 경찰로부터 호랑이를 잡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노종생 씨 등 진주 포수 5명은 오도산 줄기인 방아재에서 며칠간 잠복해 있다가 표범을 잡았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 남단에는 맹수가 사라지고 그 공백을 멧돼지가 메꾸게 된다.
언젠가 통일이 되어 백두산 일대에 호랑이와 표범이 산하를 누빌 수 있는 보호구역이 생기는 날이 오지 않을까?정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