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성전자가 자사 반도체 근로자의 백혈병 산업재해와 관련해 공식사과하고 합리적 보상을 약속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감독 김태윤)이 애초 의도하거나 목표한 일은 아니지만 일반 시민들의 십시일반으로 완성된 영화인 만큼 이 소식을 접한 심경이 남다르지 않았을까.
이 영화의 공동프로듀서인 제작사 에이트볼픽쳐스의 윤기호 대표(피디)에게 당시의 심경을 물었더니 "전북 부안에서 차기작 시나리오 작업 중이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영화가 관심을 갖게 한 지점은 있겠지만 앞서 황상기 아버지와 이종란 노무사가 꾸준히 해 왔던 일"이라고 강조한 뒤 "신중하게 지켜봐야 하겠지만 7년 만에 공식사과를 했다는 점에서 두레회원이나 스태프들에게 마음의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 저 역시도 이 영화를 만들면서 보고 느낀 희망을 어느 정도 돌려드린 듯해서 마음이 편해졌다"고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는 아쉬움도 전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만든 영화라서 목표한 100만의 절반인 50만 명만 들어서 아쉬움이 있었다"며 "특히나 6월과 7월 사이 정산을 해야 하는데, 아직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 어떤 영화보다 이 영화가 수익이 나길 바랐는데 5월 현재 -15%이상인 상태다. 박철민 배우께서 개런티를 현물투자하고 러닝을 걸면서 러닝으로 얻는 수익은 전부 기부하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못 지키게 해드려 죄송하다. 현재 IPTV와 해외 판매를 진행 중인데 끝까지 노력하겠다. 아직 못보신분들은 IPTV로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중 급성 골수성 백혈병 판정을 받고 2007년 스물 셋 나이에 세상을 등진 고 황유미 씨 가족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휴먼드라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모은 1억 원을 종잣돈으로 영화계와 무관한 개인투자, 제작두레로 총 15억 원을 모아 영화를 완성했다. 지난 2월6일 개봉을 앞두고 극장을 잡는 과정에서 '외압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한편 윤기호 피디는 영화 '마린보이'로 프로듀서 입봉했고 '친정엄마'(PD), '페이스메이커'(제작)를 작업했다.
- 뉴스를 접하고 제작진으로 뿌듯했겠다."영화를 만들 당시 황상기 아버지가 언론에 꽤 노출돼 있었고, '탐욕의 제국'이라는 다큐멘터리까지 제작되고 있었기에 우리의 목표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고 공감할 상업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소재로 인해 충무로 내부서 투자가 잘 안 됐고 2012년 대선 이후 독지가들도 빠져나가면서 포기하거나 영화의 규모를 줄여야할 판이었는데 순수 제작비 9억 8000만 원을 훨씬 웃도는 15억 원을 모으면서 100만 관객을 목표했다. 하지만 개봉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제약에 부딪혀 50만 관객에 그치면서 아쉬움이 있었다."
- 예상치 못한 제약이란 개봉관을 잡는데 겪은 어려움을 말하나."두 가지 이유로 300개관은 무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첫째, '부러진 화살'이 설 연휴 성수기에 개봉했는데 250개였고, '남영동'도 300개였다. 우리가 두 영화보다 예산을 덜 쓴 것도 아니고, 작품을 둘러싼 이슈나 보고 싶은 열망이 결코 적지 않다고 판단했다. 최다 190개관까지 잡혔으나 실상은 150개 이하에 머물렀다고 보면 된다. 서울보다 지방의 작은 관에 열어줬고, 퐁당퐁당 상영되는 곳도 많았다. 둘째, 자본의 논리에 따라 극장도 더 수익이 나는 영화를 걸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그게 깨지면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고 반성했다. "
- 결과적으로 삼성전자 측의 사과로 흥행부진의 아쉬움을 덜었겠다."이 영화를 만들면서 배우나 스태프 그리고 투자자들이 우리 영화의 제목처럼 또 하나의 가족이 됐다. 산재 소송 1심에서 승소한 뒤 3년째 항소심이 진행 중인데 삼성이 사과한 다음날인 15일에 3차 공판이 있었다. 결심과 선고가 얼마 남지 않아 배우나 스태프들이 수시로 전화해 진행 상황을 물어보고 저 역시도 투자자들과 자주 통화한다. 이번 소식이 그들에게 마음의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 저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 극장에서 내린지 3달째로 곧 정산을 앞뒀는데 수익률은 어떤가?"현재 -15%이상인 상태다. 투자한 분들이 수익을 바라지 않았으나 제작자로서는 솔직히 그 어떤 영화보다 이 영화가 수익이 나길 바랐다. 선한의지가 선순환 되려면 수익이 나는 게 중요하다. 특히나 이 영화는 충무로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 다른 도전을 해서 그 가능성을 보여준 영화다. 이렇게도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성공사례인데, 손실률이 크면 앞으로 누가 만들겠냐. 그런 점에서 어떻게든 플러스로 만들려고 노력 중이다."
- 투자자들의 반응은 어떤가?"제가 문자로 일의 진행상황을 알려드리는데 아직 손실률이 있다고 하면 오히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라,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어떤 투자자는 '한 게임 더 하자'고 하셨다. (웃음) 영화의 제작부터 개봉까지 그들과 함께한 공동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돈이 아니라 서로 마음을 나눈 관계로 다가온다. 같이 분노하고 체념한 부분도 있고 희망을 본 부분도 있다."
- 지금 돌이켜봐도 가장 힘들었던 점과 아쉬움이 있다면
"자금에 대한 압박을 제외하면 촬영하는 과정에서 힘든 점은 없었다. 역시 개봉과정이 힘들었다. 시스템 내부에 들어왔으나 다 뚫지 못했다는 점에서 가장 분노하고 체념한 시간이었다. 온라인에 '역시 안되는구나' '결과적으로 넘지 못했다'는 글을 보면서 안타까움이 더했다. 영화에서도 우리 주인공들이 이룬 게 작은 기적이고 승리였던 것처럼 우리도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한 것은 작은 승리고 기적이나, 그 정도 선에서 제한된 것이 아쉬웠다."
- 또 하나의 가족이 아니라 또 하나의 기적이라는 평가도 있었다."그렇게 편중된 작은 관에서 50만 명이 든 게 작은 기적이라고 말해 준 업계 관계자도 있었다. (웃음) 이 영화가 삼성 이야기로 국한된 것도 아쉽다. 산재는 근로자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 딸의 죽음을 계기로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다가가길 바랐다."
- 가장 감격스러웠던 순간은"촬영을 끝내고 쫑파티를 하는 날, 고 황유미 씨 부모님이 오셨다. 두 분이 우리 영화에서 윤미를 연기한 박희정 씨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울컥했다. 김태윤 감독이 트위터에 '우리영화의 마지막 컷'이라는 글과 함께 올린 사진이 바로 그때 그 모습이었다. 가장 긴장한 순간을 꼽자면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첫 공개됐는데 황상기 아버지와 이종란 노무사 그리고 피해자 가족분들이 왔다. 어떻게 봤는지 노심초사했는데 아버지께서 '이렇게 사람을 울리냐, 고맙다, 있는 그대로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해주셨다."
- 또 하나의 가족 이후 변화가 있다면."외적으로 사회적인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찾아오신다. 어떤 작품은 정중히 거절하고, 그중 하나는 현재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다. 크라우드펀딩에 대한 문의도 많이 해 오신다.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솔직히 이렇게 어려운 줄 알았다면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계속 부딪히고 깨지면서 헤쳐 왔기에 모든 영화에 통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매우 힘들지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