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책/학술

    "김구 선생 암살한 안두희를 죽이러 왔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57]4명의 의인, 릴레이하듯 추적해 끝내 처단하다

    ◈ 평범한 시민 박기서, 법 대신 정의의 이름으로 안두희를 때려죽이다

    백범 김구 선생의 초상화. 살아서는 패했으나 역사 속에 승리자로 우뚝 섰다. (사진=백범 김구기념관 제공)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의 한 아파트에 몽둥이를 든 중년 남성이 들이닥쳤다.

    몽둥이에는 '정의봉'(正義棒)'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경기도 부천에서 택시기사로 일하는 박기서라는 평범한 가장으로, 평소에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이 천수를 다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안두희를 처단하기로 결심한 후 부천시장의 그릇가게에 가서 홍두깨 비슷한 몽둥이(40Cm 크기)를 4천원 주고 사서 안두희 집으로 달려간 것이다.

    박기서 씨는 누워 있는 안두희에게 장난감 권총을 겨누며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권총이 불을 뿜는다"고 고함을 쳤다.

    이어 준비해간 나일롱 끈으로 두 손을 뒤로 묶고 '정의봉'으로 사정없이 구타했다.

    숨이 차면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 마시면서 계속 두들겨 팼다.

    이윽고 안두희는 욕된 인생을 마감했다.

    정의봉을 들어 보이고 있는 박기서씨. 박씨는 이 봉으로 안두희를 처단했다. (사진=책보세 제공)

     

    박기서 씨는 안두희 씨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신곡본동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한 후 경찰에 자수했다.

    고해성사를 들은 이준희 신부는 이렇게 회고했다.

    "박기서 씨는 김구 선생을 죽인 안두희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는데 역사가 그 일을 하지 않으니 자신이 사명감을 갖고 죽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안두희의 장례와 그 영혼에 대해 걱정하면서 성당에서 안두희 장례를 치르는데 도움을 줄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박기서 씨가 구속 기소되자, 사회 각계 인사들이 '백범 암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 의사 석방대책위원회'를 구성해 9,200명의 명의로 인천지방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박기서 씨는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김대중 대통령의 3.1절 특사로 1년 4개월만에 풀려났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백주대낮에 평범한 시민이 법대신 사람을 죽인 것인가?

    ◈ 치밀한 각본에 의한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인 안두희, 특별한 보호를 받다

    백범 서거 소식을 듣고 경교장 앞뜰에 몰려와 애도하는 시민들. 암살범의 총알이 유리창을 뚫고 나간 흔적이 선명하다. (사진=책보세 제공)

     

    "탕~탕~탕~탕"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년도 안된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45분.

    초여름의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경교장(현재의 강북삼성병원) 2층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집무실에서 총성이 잇따라 울렸다.

    아래층 응접실에 있던 비서 선우진, 이풍식, 이국태 등과 경비경찰 두 명이 뛰어 올라갔을 때는 백범은 이미 운명한 후였다.

    총을 발사한 포병 소위 안두희는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권총을 내던졌다.

    비서진이 안두희를 구타하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서대문 경찰서 경비주임에게 신병을 넘기려는 순간 갑자기 군인들이 나타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경교장에 들어선 이들은 헌병대 소속 김병삼 대위 등 현역 헌병들로, 사건 발생을 미리 알고 인근에서 대기한 것으로 보였다.

    이들은 완력으로 비서진과 경찰관을 밀치고 타고 온 스리쿼터에 안두희를 싣고 헌병사령부로 데려갔다.

    헌병사령부에는 성묘를 간 장흥 사령관 대신 전봉덕 부사령관이 대기하고 있었다.

    백범 암살 사건 현장에서 병력을 지휘한 전봉덕 당시 헌병사령부 부사령관. 여기저기서 사건 진상이 폭로되자 서둘러 미국으로 도망갔다.

     

    전봉덕은 범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의식을 되찾는대로 그 배후를 엄중 조사하겠으나 단독 범행인 것 같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이나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 등도 '단독 범행', '군과 무관', '한독당 내분' 등을 들먹이며 화살을 돌리는 데 급급했다.

    다음 날 안두희가 특무대로 이송되자 기다리고 있던 김창룡 특무대장은 커피를 제공하고 경어를 쓰는 등 극진히 대접했다.

    여기서 안두희는 김창룡이 숙직실을 호텔 수준으로 개조한 '특별감방'에서 VIP고객처럼 안락하게 지냈다.

    군법회의를 기다리는 동안 임시정부 계통인 장흥 헌병사령관은 경질되고 그 자리에 친일경찰 출신으로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전봉덕이 임명됐다.

    안두희는 1949년 8월 7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울 이태원 육군형무소에 수감됐다.

    여기서도 특별대우를 받으며 특별감방에서 유유자적하게 수형생활을 보냈다.

    그러다 이 해 11월에 15년으로, 다음해 3월에는 다시 10년형으로 감형됐다.

    유례 없는 특혜였다.

    ◈ 6.25전쟁 통에 풀려난 안두희…잔형도 면제받고, 군대로 복직하고, 사업도 승승장구

    마카오 신사복 차림으로 멋을 부린 중년의 안두희 (사진=책보세 제공)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이 제일 먼저 도망쳤다.

    그런데 이 혼란의 와중에 안두희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채병덕이나 김창룡의 도움으로 감옥을 나온 그는 육군 특무대 문관이라는 완장까지 찼다.

    다시 군대로 들어간 그는 1년도 안돼 중위, 대위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이어 1951년 2월 15일에는 신성모 국방장관의 지시로 잔형을 면제받았다.

    이에 따라 안두희는 범행 1년 7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정말 대단한 빽이다.

    그러나 부산 임시국회에서 무소속 김이환 의원이 안두희가 풀려나 군에서 고속 승진한 사실을 폭로하자, 서둘러 소령으로 진급시킨 후 예편시켰다.

    사회로 나온 안두희는 사업에 손을 댔다.

    군 상층부의 비호 속에 강원도 양구에서 군부대에 두부. 콩나물. 된장. 소고기. 돼지고기. 김치 등을 납품하며 돈다발에 파묻혔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그에게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었다.

    ◈ 이승만이 미국으로 도망가자 쫒기는 안두희

    이승만의 폭정이 드디어 4.19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 평생을 독립운동과 교육, 반독재 투쟁에 바쳤다. (사진=책보세 제공)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그해 6월 독립투사 김창숙 선생을 위원장으로 하는 '백범 김구 선생 11주기 추도식이 효창원 공원에서 열렸다.

    암살된 후 처음으로 열린 공식 추도식이었다.

    이 자리에서 '백범선생 살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가 발족해 활동에 들어갔다.

    중요한 제보가 잇따라 나왔다.

    4.19혁명 후 사회혁신당 대표였던 고정훈 씨는 "김구 암살은 이승만의 지령으로 측근 임병직 전 외무장관과. 신성모 전 국방장관이 모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고정훈은 해방 후 미 24사단 정보처 장교와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을 지낸 정보통이다.

    제헌의회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이상돈은 미국 보스톤에서 김구 암살 당시 주한 미대사관 부영사를 지낸 그레고리 헨더슨으로부터 중요한 얘기를 들었다.

    1949년 9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왼쪽)의 연설을 듣고 있는 미군 정보장교 짐 하우스만 소령 (맨 오른쪽 얼굴 보이는 사람)

     

    "핸더슨이 내게 왜 이승만이 서둘러 하와이로 망명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자기가 알기로는 김구 암살사건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도망친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이 쫓겨나자 잠적한 안두희에 대한 추적작업도 시작됐다.

    먼저 광복군 3지대 간부 출신인 김용희가 종로 2가에서 안두희를 발견하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인 끝에 붙잡아 검찰에 넘겼다.

    그러나 일사부재리 원칙과 공소시효 10년이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김제 출신의 열혈청년 곽태영이 나섰다.

    그는 1965년 12월 22일 강원도 양구군 중리에서 안두희를 찾아내 잭나이프로 목을 찌르고 돌로 머리를 쳐 중상을 입혔다.

    세번째 응징자는 권중희였다.

    그는 1992년 4월 12일 인천의 아파트에 숨어 사는 안두희를 찾아내 정의봉으로 두들겨 패며 '배후'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정의봉에 두들겨 맞은 암살범 안두희와 권중희 (오른쪽) (사진=권중희 제공)

     

    권중희 씨는 5개월 후 이번에는 안두희를 경기도 가평의 한 농가에 감금시켜 놓고 동아일보 기자와 함께 캐물었다.

    이때 안두희는 중대한 고백을 한다.

    "백범 암살 6일 전인 6월 20일에 경무대(현재의 청와대) 집무실로 불려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신성모 국방부장관한테 얘기 많이 들었다. 높은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잘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 얽히고 설킨 사건의 배후…'이승만이 시키고 군부가 실행한 것'이 가장 유력

    백범 선생 암살사건의 진상을 집대성한 문제작 <안두희, 그="" 죄를="" 어찌할까="">

     

    오랜 기간 백범 김구 암살사건을 추적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이 책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추적자들과 연구가들에 의해 드러나기 시작한 암살 배후는 김창룡과 신성모를 비롯한 군부세력, 해방 후 친일파 척결을 주장해온 김구에게 위협을 느낀 친일세력, 그리고 단독정부 추진세력이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면서 북한과의 대화를 바라는 김구의 정치노선을 비판해온 미 정보기관의 개입 여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의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할 때 이승만의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승인' 또는 '암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2009년 백범 60주기를 맞아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유치원 선생님을 따라 백범 묘소를 찾아 절을 올리고 있다. (사진=재단법인 김구재단 제공)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 올라갔고, 김구는 암살되었다.

    현실에서 이승만은 승리자고, 김구는 패배자다.

    하지만 두 사람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정반대다.

    현실의 승자 이승만은 국민이 권좌에서 끌어내린 독재자가 되었고, 패자 김구는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 순교자이며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이것이 역사의 반전이다.

    이 시각 주요뉴스


    실시간 랭킹 뉴스

    노컷영상

    노컷포토

    오늘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