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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고택의 마당에 철로를 깔아 맥을 끊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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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투사 고택의 마당에 철로를 깔아 맥을 끊어버려라"

    [임기상의 역사산책 68]석주 이상룡, 식솔을 끌고 항일운동에 뛰어들다

    임청각 바로 앞에 중앙선 철로가 지나가고 있다.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일제, 독립운동의 산실 '임청각'을 훼손하다

    보물 제182호인 조선시대의 목조 건물 임청각(臨淸閣).

    설립 당시에는 99칸 규모였지만 마당에 중앙선 철로가 지나가면서 지금은 70칸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 집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배출되자, 일제는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아예 없애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문중을 중심으로 안동시민들이 반발하자 집 일부를 허물고 마당으로 철길을 내버렸다.

    철길이라면 대개 직선이 원칙인데, 일제는 이 집을 훼손하려고 10여 km를 더 돌아 3개의 터널을 뚫고 옹벽과 축대를 쌓아 두 번이나 급하게 휘면서 마당으로 철로를 뚫은 것이다.

    이 때문에 바로 앞에 놓인 낙동강과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잃어버렸다.

    임청각 전경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이 집에서 태어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일제가 이를 갈 만 하다.

    신돌석 장군 휘하에서 의병운동을 시작한 이상동,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이봉희, 만주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이승화, 만주 유하현 경학사에서 활동하다가 1942년 일제의 팽창에 실망해 자결한 이준형, 신흥무관학교 자금 조달과 비밀결사 신흥사에서 활약한 이형국, 서로군정서 특파원을 지낸 이광민, 압록강 연안의 일본 경찰 주재소와 세관을 습격한 이병화가 모두 임청각에서 태어났다.

    이들을 이끈 인물은 이 집안의 종손이자 주인인 석주 이상룡이다.

    이상룡은 고성 이씨의 종손으로 퇴계학의 적통을 계승한 유학자이다.

    조선의 국운이 기울자 가야산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도 했으나 한계를 깨닫고 만주로의 망명을 결심한다.

    그를 따라 50여 가구가 서간도로 망명길에 올라 치열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이 집안에는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가 9명이 배출된다.

    고성 이씨의 가계도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석주 이상룡, 이회영 집안을 따라 재산을 정리하고 서간도로 망명하다

    우당 이회영 일가가 압록강을 건넌 직후인 1911년 1월 5일.

    이상룡은 임청각 내 군자정 옆의 연못을 지나 언덕 위 가묘로 향했다.

    선조들의 위패에 살아 생전 마지막이 된 절을 올렸다.

    저녁에 집을 나선 이상룡은 경성에 도착해 우강 양기탁을 만나 독립운동 전략에 대해 논의한 뒤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로 떠났다.

    1월 25일 신의주역에 가족들이 도착했다.

    맏아들 이준형이 맨 앞에 서고 맨 뒤에는 동생 이봉희 부자가 부녀자와 아녀자들을 보호하며 기차에서 내렸다.

    임청각의 주인 이상룡은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고 전 재산을 정리해 서간도로 망명했다.

     

    안동의 대표적인 명문 일가가 집단 망명을 위해 신의주에 집결한 것이다.

    이틀 후 이상룡 일가는 발거(썰매 수레)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안동현에서 마차 두 대를 타고 1차 집결지인 횡도촌에 도착했다.

    횡도촌에는 처남인 백하 김대락 일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망명객들은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집결해 한인촌을 만들었다.

    1911년 4월 추가가의 뒷산인 대고산에 수백여 명의 망명객들이 모여 노천 군중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이주 동포들의 안착과 농업생산을 지도하는 기관으로 '경학사'를 조직했다.

    경학사 대표에는 이상룡이 추대되었다.

    경학사는 취지서를 통해 "아아~ 사랑할 것은 조선이요, 슬픈 것은 한민족이로구나"고 천명하며,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 신흥무관학교 설립하고, 서로군정서 지휘하다 상해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다

    경학사가 중심이 되어 통화 인근의 합니하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서간도 일대에 독립열이 고조되자 일종의 임시정부인 군정부가 조직됐다.

    군정부 총재로 취임한 이상룡은 상해에서 탄생한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이름을 '서로군정서'로 바꾸고 상해임정의 지도를 받아 무장독립투쟁을 벌여 나갔다.

    상해임시정부 청사 (사진=역사의 아침 제공)

     

    서로군정서는 2개 연대를 두었고, 그 아래에 6개 대대를 조직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나갔다.

    한편, 상해임시정부는 1925년 여름 이상룡에게 초대 국무령으로 부임해달라고 요청했다.

    내각책임제의 국무령이면 지금의 대통령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상룡은 1년도 안돼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서간도로 돌아온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계파 갈등, 내분을 보고 환멸을 느낀 것이다.

    ◈ 일본의 만주침략으로 혼란에 빠진 서간도…이상룡, 절망 속에 쓸쓸히 세상을 떠나다

    만주군벌인 장작림의 부대. 일본군에게 밀리자 주민들을 상대로 강도짓을 벌인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자 독립운동은 일대 위기에 처했다.

    일본군의 토벌도 문제지만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과 후퇴하는 중국 군벌 휘하의 군인들의 행패가 문제였다.

    중국군 패잔병들은 일본군에 쫒기면서 민가를 뒤지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이 와중에 숱한 독립운동가들과 이주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패잔병들은 조선인 마을에 몰려와 "너희가 왜 일본을 끌어들여 우리나라를 뺏기게 하느냐?"며 "우리도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일본의 만주 침략과 동지들의 희생을 지켜본 이상룡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 병석에 누웠다.

    이상룡이 병중이란 소식을 듣고 안동에서 아우 이상동이 찾아왔다.

    귀국을 권하는 동생에게 이상룡은 "나 죽기 전에는 여기를 못 떠난다.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나만 들어갈 수 없다. 나 죽고 나거든 남은 가족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겠다"

    이어 아들 손자 등 가족들 앞에서 유언을 남겼다.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돌아서는 안 된다. 우선 이곳에 묻어두고서 기다리도록 하거라"

    석주 이상룡은 1932년 6월 15일 길림성 서란현에서 74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이상룡 일가의 망명과 귀국길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임종 엿새 후 이상룡 후손들은 귀국을 서둘렀다.

    일행은 70여 명이었다.

    망을 보며 조심스럽게 관을 모시고 길림으로 가다 또 수백 명의 중국 패잔병들을 만나 온갖 수모를 겪었다.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와 광복된 조국 땅에 다시 모시기를 기약하며 초상을 치렀다.

    다들 관이 땅에 묻히는 것을 보면서 "이 어른이 무슨 영이 있는 모양이야~"라고 탄식했다.

    후손들은 천신만고 끝에 길림에서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경성을 들른 뒤 삼복더위에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문중 사람들이 대전과 김천, 예천까지 마중나왔다.

    안동역에는 100여 명의 족친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일본 경찰이 알려준 것이다.

    ◈ 이상룡 후손들, 일본 경찰의 감시와 가난 속에서 역경을 이겨내다

    26살에 고성 이씨 종부가 되어 고향에 돌아온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이상룡 선생의 손자 며느리인 허은 여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라의 운명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친정도 시가도 양쪽 집안은 거의 몰락하다시피 되어 있었다. 양가 일찍 솔가하여 만주벌판에서 오로지 항일투쟁에만 매달렸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상룡 선생의 손자 며느리인 허은 여사. 서거하기 전에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남겼다.

     

    허은 여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통한이 뼈에 사무친 것은 양가가 몰락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한국인 모두 몰락했다면 그것은 결코 통한이 될 수 없었다.

    다시 그녀의 회고를 들어보자.

    "그때 친일한 사람들의 후손들은 호의호식하며 좋은 학교에서 최신식 공부도 많이 했더라. 그들은 일본, 미국 등에서 외국유학도 하는 특권을 많이 누렸으니 훌륭하게 성공할 수 밖에. 그러나 우리같이 쫓겨다니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위기를 넘긴 사람들은 자손들의 교육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오로지 어른들의 독립투쟁, 그것만이 직접 보고 배운 산 교육이었다. 목숨을 항상 내놓고 다녔으니 살아있는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그 허허벌판 황야에 묻힌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데...불모지에 잡초처럼 살았지"

    이상룡 후손들은 귀국 후에는 일본 형사들한테 들볶였다.

    1942년 9월에는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이 유시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일제가 싱가폴을 점령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일본 경찰이 계속 따라다니며 변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기 때문에 모두들 가난에 시달리고, 자식들도 교육비가 없어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민주화가 되면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대접이 달라졌다.

    이상룡 집안에서만 3대에 걸쳐 9명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

    이상룡 선생을 비롯해 형제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와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당숙인 이승화 선생이 훈장을 받았다.

    이상룡 선생의 매부 박경종 선생과 처남 김대락 선생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이상룡 선생의 겹사돈인 허씨 집안에서는 왕산 허위 선생과 그의 형제인 허훈. 허겸, 아들 허영 선생에게 훈장이 수여됐다.

    더 큰 경사가 이상룡 집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룡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지 45년만인 1990년 9월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되어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가 96년 임정묘역으로 옮겨졌다.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중국과 국교가 체결되자 이상룡 후손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유해를 봉환하게 되었다.

    1990년 9월 13일 오후 4시, 김포공항 연도에 1,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묵도를 하며 대환영을 했다.

    커다란 태극기에 덮인 이상룡 선생의 유해와 위엄에 찬 영정을 보자, 후손들 모두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12일간 참배객들의 조문을 받고 25일 고향 안동으로 유해를 모셔갔다.

    경기도와 충청도, 경상북도를 지나가는 연도에는 수많은 인파와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묵도하며 맞이했다.

    각 도계와 안동 시계를 들어설 때는 마중 나온 각급 기관장들의 엄숙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고택 임청각에서 열린 안치 행사에는 안동 시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열이레 동안 한 많은 넋을 달래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된 후 6년 후 서울 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으로 옮겨졌다.

    이상룡 선생의 영혼이 있다면 광복된 나라에서 내 백성이 반겨주는 모습을 보고 나라 빼앗겼던 설움이 다 풀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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