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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일반

    충무공 이순신의 바다와 세월호의 바다

    [변상욱의 기자수첩]충무공 영웅화의 시대별 변천사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영화 '명량' 바람이 정치권에도 거세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일 이 영화를 관람했고 새누리당 이인제 최고위원, 김무성 대표, 야권에서는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전병헌 전 원내대표 등등 여럿이 영화를 보고 한마디씩 소감을 피력했다. 모두들 나라와 역사에 대해 깊은 생각들을 했다고 한다.

    압권은 청와대 대변인 브리핑, "'신에게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다'는 이순신 장군의 말씀은 과거 한나라당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께서 인용한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청와대 대변인의 논평은 3류 용비어천가일 뿐이다.

    날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군대에서 타살로 자살로 허망하게 목숨을 잃는 우리 젊은이들 소식이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그 바다에서 원통하게 숨진 세월호 영령들의 한을 풀지 못해 죽음의 단식을 계속하는 유가족 어버이들의 농성 소식이다.


    ◈ 충무공의 바다, 세월호의 바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기적과 같은 전승을 연거푸 올리고 장수로서의 삶 또한 모두의 귀감이 되니 당연한 일이다. 왕들과 유학자들이 너도 나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문을 지어 헌정했지만 가장 유명한 건 선조의 제문이다.

    "나는 경을 버렸지만 경은 나를 버리지 않았구려…"

    또 숙종은 현충사 제문에 이렇게 쓴다.

    "제 몸 죽어 나라를 살림은 이 사람에게서 처음 보노라…"

    이때는 봉건왕조 시대이다. 이순신 장군은 '민족의 영웅'이기보다 '충성스런 신하'의 이미지가 강하다. 왕과 종묘사직을 지킨 훌륭한 장수로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 이미지에 왕실 아닌 민족과 조국의 개념이 더 강하게 반영된 것은 일본과 중국 등 열강의 수탈이 시작된 조선 조 말기로 본다. 민족의 주체성, 민족의 자주성을 일깨우기 위해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하고 귀감이 되는 인물을 찾았을 때 당연히 가장 먼저 내세울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었다. 신채호 선생은 '대한매일신보'에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이라는 소설을 연재하며 왕이 아닌 나라와 민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이순신 장군을 그려냈고 그 이미지는 널리 전파된다.

    그 다음은 일제 강점기. 이순신 장군은 다른 나라도 아니고 침략자 일본을 눌러 이긴 영웅으로서 민족 모두의 가슴 속에 더 깊이 신화처럼 새겨진다. 민족의 얼을 되찾으려 힘쓰던 시절이니 당연하다. 그러다 문중재산이던 이순신 장군 묘소가 포함된 토지가 은행에 저당 잡혀 경매에 붙여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문제로 '이충무공유적보존회'가 만들어지고 저당권 해제를 위한 모금운동이 전개됐다. 이에 앞장 선 것은 동아일보였고 성금이 답지했다. 우국충절의 지식인은 물론이고 술집접대부, 기생, 소작농 등 이 땅의 민중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성금을 보탰다고 전해진다.

    어느 가난한 소작농은 가족이 먹을 쌀을 사러 나갔다가 우연히 신문을 읽고 피가 끓어 성금을 냈는데 "충무공의 은혜를 생각하면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다"며 무려 1원을 송금했다고 한다. 춘원 이광수의 역사소설 '이순신'도 이때 신문에 연재되었다. 눈여겨 볼 것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시기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극하고 왕이던 선조는 무능한 엑스트라급 조연으로 추락했다는 점이다. 왕에게 충성한 것이 아니라 조국과 민족에게 충성한 것으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진일보한 해석이 자리를 굳혔다. 더불어 조선의 백성들은 힘없고 무지하며 조선왕조와 신하들은 무능하고 부패하고 당파싸움만 일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이는 일제가 식민사관을 통해 바라던 것이기도 하니 역사에 대한 해석은 신중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 '명량' 관람 (사진=청와대 제공)

     


    ◈ 정권의 정통성 조작에 충무공 끌어들여…

    해방 이후 이순신 장군은 6·25 전쟁으로 다시 한 번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되고 이승만 정권은 반일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다. 동상과 추모비를 건립했고 1959년 난중일기를 국보로 지정했다.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는 본격적인 숭모 사업이 전개된다. 1966년 현충사 성역화 공사가 진행됐다. 이 공사 기획회의에는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고 공사현장도 수시로 방문했다. 1년에 한 번 탄신기념행사가 열리면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까지 참석해 분향했는데 충무공 탄신일 기념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18년 집권하며 14번 참석할 정도였다니 대단한 정성이었다고 하겠다. 탄신일을 국경일로 만들려고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968년 4월에는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이순신 동상이 세워졌다. 정부가 충무공의 노래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부르게 한 것도 이 때이다. 화폐에도 우표에도 담배에도 이순신 장군이 등장하니 대한민국 국민의 삶 속 어디에나 성웅 이순신이 존재하기에 이른다.

    박정희 정권은 왜 이리 이순신 숭모사업에 열성을 보인 걸까?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2가지 치명적인 결함 때문에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첫째는 한일국교정상화이고 둘째는 쿠데타에 의한 집권이다.

    박정희 정권은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약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일본에 돈 받고 팔아넘겼다는 비난을 받았다. 따라서 일본을 쳐부순 민족영웅 이순신 장군을 부각시키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을 끔찍이 숭모하는 모습을 연결시켜 굴욕한일협약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군사를 이끄는 장수이지만 이미 무능한 왕보다 우월한 능력과 인품을 가진 인물로 공인돼 버렸고, 계급과 신분을 초월해 민족의 지도자가 된 존재였다. 이는 군부의 장성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부를 전복하고 국가 최고실력자가 되어 민족근대화를 이끄는 것과 비슷한 서사구조를 갖는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조국이 처한 현실이 임진왜란 때와 비슷하다며 국민을 이순신에게 몰입 시키고, 무능한 민선 정부 대신 군 출신의 진정한 영웅이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이미지 조작을 기획한 것이다.

    "하늘의 태양과도 같이 만고에 빛나는 충무공 같은 위대한 조상을 가진 것은 영광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가슴에는 공의 정신이 들어 있고 혈관에는 공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어록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그런데 그의 최후에 핏 속에 흐르던 건 수입산 양주였다니…

    그렇다면 지금의 이순신 열풍은 무얼까? 2014 충무공 열풍은 국가주입식 충성교육이 아니다. 이번 열풍은 국민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국가와 정부에게 실망하고 분노하는 시대적 공감이 국민을 이순신 장군에게로 향하게 했다고 할 것이다. 국가를 믿지 못하고 위정자를 믿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신과 불안감이 이순신 장군을 다시 불러내었고 그런 지도자를 새로이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영화관으로 달려가 내가 닮아 있지 않냐며 셀카를 찍어 돌린다. 웃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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