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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군은 교전 중인 적 외에는 인민을 해치지 않는다"

책/학술

    "남부군은 교전 중인 적 외에는 인민을 해치지 않는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82]인간적 공산주의자 '이현상', 빗점골에서 산화하다

    ◈ 이현상, 피비린내 나는 순천에 나타나다

    평양에 있는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된 이현상의 사진.

     

    1948년 10월 22일 저녁.

    독립투사 출신이자 남로당 핵심간부인 이현상이 순천역 앞에 도착했다.

    이 작은 도시에서는 반란군과 좌익이 이성을 잃고 학살극을 벌이고 있었다.

    시내 곳곳에는 이미 1,000명에 달하는 경찰과 우익인사들이 희생돼 온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

    이현상은 25년전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래 악독한 고문도 받아보고, 수십 명이 넘는 동지들의 고통스런 죽음을 경험해봤지만, 이같은 처참한 떼죽음 앞에 설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같은 민족에게 이처럼 잔인한 살상을 벌인 것은 누가 원인 제공자이든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

    이현상은 나중에 산속에서 여순사건에 대한 토론이 벌어질 때마다 '민중봉기가 아니라 반란'이라고 격하했다.

    당의 일사분란한 명령에 따라 봉기했어야 했는데 우발적으로 일으켜 수많은 혁명역량과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고 비판했다.

    국방색의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거북껍데기로 만든 누런 테 안경을 쓴 43살의 중년남자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반란군을 인솔해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이현상이 남부군 부대를 끌고 들어가게 되는 남덕유산 연봉들.

     

    더 이상의 인명피해를 줄이려면 시내에서 진압군과 전투를 벌여서는 안된다는 판단이 섰다.

    반군을 산악지대로 이동시켜 대오를 정돈한 다음 본격적으로 유격전을 벌이기로 했다.

    그는 반군 지휘자인 홍순석 대위와 지창수 상사를 만나 지휘권을 넘겨 받았다.

    이날 밤 반군을 가득 실은 10여 대의 군용트럭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순천을 빠져나갔다.

    순천에 남아 있던 400명과 사방으로 진출했다가 진압군에 밀려 돌아온 200여 명이었다.

    여수에 남아 있던 병력은 조계산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들 병력을 다 모아 구례읍을 통과해 지리산 문수골로 들어갔다.

    숙영할 준비를 끝낸 후 이현상은 지휘관들을 모아 엄명을 내렸다.

    "인민의 군대인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인민을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인민을 함부로 죽이거나 괴롭히면 안됩니다. 설사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정당한 인민재판의 절차를 거쳐 심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총을 들이댄 적이라도 모두 우리의 동포, 우리의 형제입니다. 일단 포로로 잡으면 절대 죽여서는 안됩니다. 이 규약을 어기면 가차없이 처단할 것입니다"

    교전 중인 적 이외에는 죽이지 않는다는 이현상의 선언은 지리산 유격대의 최고 지침으로 거듭 강조되었다.

    이 지침은 이현상이 이끄는 유격대가 고립무원의 산악지대에서 수년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 '한국의 체 게바라' 이현상은 어떻게 해서 빨치산 투쟁에 뛰어 들었나?

    중앙고등학교에 세워진 6.10만세 기념비. 맨 먼저 시위를 한 이현상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1925년 4월 25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서거했다.

    그보다 1년전 비밀리에 결성된 조선공산당은 장례일인 6월 10일일 대대적인 시위를 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사전에 적발돼 공산당 지도부 200여 명이 체포됐다.

    결국 만세운동은 주로 학생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가장 앞장선 학교는 중앙고보였다.

    6월 10일 이른 아침 순종의 상여가 지나가는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수 킬로미터의 인도는 30여만 명의 추도 인파로 가득했다.

    살벌한 경비망을 뚫고 맨 처음 만세를 부르고 뛰어나간 학생은 중앙고보 4학년 이현상이었다.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였다.

    그는 일본군 해군의장대가 장송곡을 연주하며 통과할 때 돌연 태극기를 들고 뛰쳐나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한독립만세! 이천만 동포여~ 원쑤를 몰아내자!"

    다른 중앙고보생들도 우르르 도로로 몰려나갔다.

    건너편에 도열해 있던 중동고보생들도 합세했다.

    거리는 일시에 혼란에 빠져 들었다.

    여기 저기에서 잇달아 시위가 발생했다.

    이날 서울에서 체포된 학생만 210명에 달했다.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 나가 전국에서 5,000여 명이 연행되고, 160명이 다쳤다.

    체포된 학생들은 모진 구타와 고문에 시달렸다.

    6.10만세운동의 맨 선두에 섰다가 첫 감옥살이에 들어간 젊은 이현상. 다부진 얼굴에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이현상은 6개월만에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감옥에서 이현상은 수감된 수많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공산주의 기초이론을 배웠다.

    이때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현상은 해방될 때까지 4번에 걸쳐 12년간 감옥에 갇히게 된다.

    고려공산청년회와 연류돼 두번째로 체포됐을 때 그는 재판정에서 당당히 호통을 쳤다.

    "나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이며 일본 제국주의는 반드시 공산주의 혁명으로 붕괴되고 조선은 독립할 것이오!"

    이날 재판정에는 금산에서 올라온 가족과 사촌들, 학교 동창들이 대거 방청했는데, 쩌렁쩌렁 울리는 이현상의 연설에 모두들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한다.

    이현상의 형제와 사촌들은 일본인 판사를 향해 조금도 굽힘 없이 우렁차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그의 모습에 감동해 고향에 돌아가서 두고두고 이야기했다.

    이현상은 최종심에서 4년형을 선고받았다.

    혐오감을 주는 용수를 뒤집어 쓴 채 재판소로 끌려가는 독립운동가들.

     

    그는 감옥에서 평생의 동지 이재유와 김삼룡을 만났다.

    이들 세 사람은 석방되면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함께 노동운동에 뛰어들기로 약속했다.

    출감 직후인 1933년 1월 이현상, 이재유, 김삼룡을 주축으로 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트로이카'라는 지하조직이 결성됐다.

    이 조직은 젊은 혁명가들을 규합해 경인지역에 적색노조를 잇따라 결성해 파업을 주도하고, 경성시내 고등학교의 동맹휴학을 지도해 나갔다.

    8개 공장이 연쇄 파업을 벌이자 뭔가 배후가 있을 것으로 짐작한 일본경찰의 검거선풍이 불었다.

    이현상은 또다시 체포돼 4년 7개월간의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1938년 6월 이현상이 34살의 나이에 세번째 옥살이에서 풀려나왔을 때 국내외 정세는 험악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본군은 만주에 이어 중국 본토로 파죽지세로 밀고 나가고 있었고, 국내 독립운동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도처에 친일파들이 설치고 있었다.

    이현상은 김삼룡, 이관술, 정태식, 이순금, 박진홍 등과 규합해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지역 공산주의자의 모임'이란 의미의 경성코뮤니스트그룹, 줄여서 '경성콤그룹'을 창립했다.

    1930년대 중반의 박헌영.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상해에서 국내에 잠입했다 체포되었을 때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일제말에 국내에서 일제에 항거한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지도자로는 조선공산당 창립 멤버의 하나였던 박헌영을 영입했다.

    그러나 경성콤그룹은 1940년 여름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검거사태를 맞아 와해되고 만다.

    지도부 중에 체포를 면한 박헌영은 광주에서 벽돌공장 노동자로 숨어 지내고, 이관술은 고물상으로 변장해 전국을 떠돌아 다닌다.

    일본이 패망해 조선이 해방되자 좌익의 주도권은 마지막까지 변절하지 않고 일본에 대항한 경성콤그룹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이들이 재건한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되고, 좌익과 우익은 한반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격렬한 충돌을 벌이게 된다.

    박헌영을 따라 월북했던 이현상은 남한의 정세가 험악해지자 소련 유학을 포기하고 다시 38도선을 넘어 남한으로 내려온다.

    ◈ 산속에서 버틴 5년의 빨치산 생활…그들은 "총 맞아 주고,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빨치산 지도부가 갖고 있던 남한 전체의 산악 지도. 지리산에서 시작해 설악산까지 주요 산과 고개들이 기재돼 있다.

     

    이현상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반란군 600여 명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지리산 일대에서 토벌대와 격전을 벌이던 빨치산 부대는 겨울이 지나면서 세력이 위축됐다.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면서 지리산 일대 주민들만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1950년 봄에 천왕봉의 북동쪽 계곡인 조개골에 모여든 대원은 150명에 불과했다.

    더이상 생존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이현상은 이들을 이끌고 북으로 향하기로 했다.

    환자를 빼고 걸을 수 있는 인원은 70명 정도였다.

    이들이 덕유산을 거쳐 무주의 적상산 기슭에 자리잡았을 때 정찰대원들이 뛰어오면서 외쳤다.

    "전쟁이 났답니다. 농부들이 그러는데 인민군이 밀물처럼 내려와 어제 대전을 함락시켰답니다"

    남로당이 붕괴되면서 모든 연락이 끊기자 보름전 시작된 전쟁 소식도 모른 것이었다.

    무주읍 남쪽의 적상산. 토벌대에 쫓겨 북상하던 이현상 부대는 이 산에 와서야 한국전쟁이 터진 사실을 알았다.

     

    환호하던 이현상 부대는 산속을 벗어나 오랜만에 도로를 걸어 무주읍내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양산에 머물던 시절 인민군이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이현상부대도 후퇴행렬에 동참했다.

    이들이 북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 들어설 무렵 하얀 말을 탄 이승엽 남조선해방지구 군사전권위원이 달려왔다.

    그는 남한지역의 모든 빨치산을 '남반부 인민유격대'. 약칭 남부군으로 통합하고 이현상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이현상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퇴로가 막힌 인민군 패잔병 2만 명을 규합해 후방을 교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950년 11월 10일 정식으로 남부군이 창설되었다.

    860명에 달하는 규모였다.

    지리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충북의 도청소재지인 청주를 공격했다.

    1951년 5월 26일 새벽 청주시의 주요 기관들은 순식간에 빨치산에게 점령되었다.

    청주경찰서와 충북도경 무기고에서는 무기가 털리고, 은행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꺼내갔다.

    청주교도소에서는 수감돼 있는 좌익수 142명이 석방되었다.

    불과 30분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1951년 4월 오대산에서 체포된 여성 빨치산들.

     

    이 날은 충북도경국장을 비롯한 경찰간부들이 금강변 부강유원지에 놀러가는 날이어서 비상소집마저 이뤄지지 않았다.

    이 날이 남부군의 최고 절정기였다.

    이승만 정부의 충격은 컸다.

    1951년 11월 말부터 수도사단과 8사단, 15사단을 지리산으로 남하시켜 총 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국군은 작전시기를 겨울로 택해 24시간 교대로 빨치산을 추적했다.

    세 차례의 대규모 작전으로 남부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군사적인 타격을 입고 허우적거리던 이현상에게 정치적 타격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북한에서 이현상이 속한 남로당 숙청이 시작된 것이다.

    1953년 3월 하순,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출신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시작되었다.

    이들 중 8명이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불과 일주일만인 8월 3일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 이현상, 빗점골에서 사살된 채 발견되다

    이현상의 시신이 발견된 지리산 빗점골 너덜바위 아래의 계곡.

     

    이현상은 남부군 사령관 직을 사임하고 평당원으로 돌아가 하산해 지하활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사실상 남로당의 수뇌부라는 이유로 숙청된 것이다.

    한편 경찰에 체포된 이현상의 호위대원으로부터 이현상이 빗점골로 내려온다는 정보를 들은 차일혁 토벌대장은 병력을 출동시켰다.

    1953년 9월 18일 오전 11시 30분, 차일혁은 기다리던 무전보고를 받는다.

    "10시경 이현상을 비롯한 3명이 너덜바위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발견하고 집중사격한 결과 이현상을 사살했습니다"

    이현상의 죽음을 보도한 1953년 9월의 동아일보 기사.

     

    확인하기 위해 경찰과 같이 올라간 이현상의 호위병들은 그가 이현상임을 확인하고는 무릎을 꿇은 채 "선생님~ 죄송합니다"라며 오열했다.

    이현상의 주머니에서 뜻밖에 염주 한 줄이 나와 화제가 됐다.

    숱한 죽음을 겪으면서 철저한 이념의 신봉자였던 그가 마지막에는 불교에 귀의한 것 아닐까?

    이현상의 시신은 창경원에 전시되었다가 남원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유일하게 고향 외부리에 살고 있는 막내 작은 아버지 이윤배 씨가 "온 집안을 풍비박산 낸 놈이라 꼴도 보기 싫다"고 거절해 차일혁 부대장이 대신 약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렇게해서 조선독립과 공산주의 통일이라는 목표에 전 인생을 걸었던 한 사나이의 흔적은 사라지고 만다.

    ◈ 북한에서 엘리뜨로 살고 있는 이현상의 자식들

    이현상의 묘소를 찾은 자녀들. 1994년에 북한에는 이현상의 4남매를 비롯해 아들, 딸, 손자, 며느리 등 42명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

     

    이현상은 북한에 올라가 김일성을 만났을 때 남한에 있는 자식들을 보호해달라고 부탁했다.

    외아들 이극은 1948년 8월에 먼저 월북했고, 아내 최문기와 세 딸은 전쟁 때 인민군을 따라 올라갔다고 한다.

    월북한 가족들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특별한 배려로 순탄하게 북한생활에 적응했다.

    김일성은 정적 박헌영과 그 부하들은 싫어했지만, 남한에서 빨치산 투쟁을 지도하는 이현상을 존경했다고 한다.

    본인이 빨치산 출신이기도 했고, 빨치산 활동을 미화하는 정책의 좋은 본보기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 극은 김일성의 지시로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후 김일성대학에서 교수를 지내다 정년퇴직하고 나서는 인민대학습당의 국제도서교환처장으로 일했다.

    큰 딸 무영은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정치부와 노동당에서 일했다.

    그녀의 일흔 살 생일에는 김일성이 직접 잔칫상을 보냈다고 한다.

    둘째 딸 문영은 혁명유자녀가 다니는 만경대 혁명학원을 졸업하고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일했다.

    노동신문에 공개된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

     

    막내딸 상진은 대학을 졸업한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북한의 첫 여성 일등서기관이 되어 경공업분야를 담당했다.

    2000년 6월 북한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의 만수대의사당에 갔을 때 안내한 여성이 바로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이었다.

    남한을 붕괴시키기 위해 2만 명의 빨치산을 지휘했던 이현상의 딸이 남한의 대통령을 안내했으니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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