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미소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한국 당구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김경률은 26일 강화도의 한 추모공원에 안치되면서 영면에 들어갔다. 경기에서 이기면 나오던 그의 사람좋은 미소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자료사진=대한당구연맹)
한국 당구의 르네상스를 이끈 개척자 김경률. 35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지난 22일 경기도 고양시 어머니의 아파트 20층에서 떨어져 숨진 김경률. 5일장을 치른 뒤 오늘(26일) 화장을 통해 수습된 그의 유골은 강화도에 있는 한 추모공원에 안치됐습니다. 부인과 세 살 난 딸 등 유족과 당구 관계자 등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발인을 앞둔 어젯밤에는 장례식장에서 대한당구연맹의 추도식이 열렸습니다. 그의 생전 라이벌이자 절친했던 동료 최성원(38)이 선수 대표로 조사(弔詞)를 낭독했습니다. 동갑내기 강동궁과 '제 2의 김경률'로 불린 천재 김행직(23) 등 동료 선수들도 함께 했습니다.(유족의 간곡한 부탁으로 연맹은 추도식 장면은 촬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장영철 연맹 회장은 "대한민국 당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김경률 선수의 부음에 전 세계 당구계가 큰 슬픔에 빠졌다"면서 "그의 페어플레이 정신을 기리고 영면을 기원하고자 전 당구인들과 함께 애도할 것"이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연맹은 3월을 '김경률 추모의 달'로 정해 페어플레이 캠페인과 추모 영상 제작 등으로 그를 기릴 예정입니다. 세계캐롬당구연맹(UMB)도 오늘부터 독일에서 열리는 세계 팀 3쿠션 대회에 애도 행사를 열기로 했습니다.
▲타 종목 슈퍼 스타와는 달랐다김경률이 특별했던 것은 '보통 사람의 영웅'이었기 때문입니다. 통상 스포츠 스타라고 하면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구름 위의 존재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어릴 때부터 엘리트 스포츠를 통해 자라온 데다 톱스타의 자리에 오르면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려 가까이 다가서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물론 친해지고 마음을 열게 되면 이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은 들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김경률은 조금 달랐습니다. 당구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동네 친구', 아니면 보는 사람의 나이에 따라 '동네 형' '아는 동생'이 될 수 있는 푸근한 인상이었습니다. 탁월한 운동 신경이 없어도 손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는 당구라는 종목의 특성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김경률은 생전 경기에서 이기면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사진은 지난 2010년 터키 월드컵에서 우승한 뒤 태극기를 꽂는 모습.(자료사진=대한당구연맹)
대학 동기 중에 운동에는 젬병(?)이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농구를 좋아해 결성한 동아리에도 동참했던 그 친구는 열정을 따르지 못하는 운동 신경에 늘 애를 먹었습니다. 야구, 축구, 탁구 등 다른 종목에서도 감각과 재치로 벌충하긴 했지만 조금 느리고 힘이 달리는 열세를 온전히 만회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그 친구에게 동기들이 단연 엄지를 치켜세운 종목이 있었으니 바로 당구입니다. 순발력이 떨어져도 상대를 압도하는 우악스러운 힘이 없어도 그 친구는 다른 동기, 선후배들을 데리고 놀았습니다. 물론 짜장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박카스로 밤을 지새우며 당구장에서 살았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 친구는 동기들 사이에서 당구만큼은 최고가 됐습니다.
김경률도 그런 선수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다른 종목의 슈퍼 스타처럼 울퉁불퉁하게 다져진 근육질의 몸매가 아니라 배가 적당히 나온 후줄근한 몸매. 누구라도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던 일반인의 영웅이었던 겁니다. 당구로 또래 중 최고가 된 그 친구도 언젠가 김경률과 한판승부를 벌였다며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김경률은 일반인 고수들의 겁없는 도전도 사람좋게 받아들였던 그런 친구였습니다.
▲'적당한 허풍' 인간미 넘쳤던 영웅김경률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8년. 당시 수원 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열린 미디어 데이였습니다. 만약 우승을 한다면 한국 선수로는 16년 만의 일이라 미리 인터뷰를 하는 자리였습니다. 당시 국내 선수 중 세계 랭킹이 6위로 가장 높고 시드 배정까지 받은 데다 홈에서 열리는 대회라 시차도 없어 가능성이 꽤 높아보였습니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김경률은 당시까지의 삶을 풀어냈습니다. 16살에 큐대를 잡아 당구에 미쳐 살아낸 과정과 월드컵을 맞는 각오에 대해 "고향 경남 양산에는 적수가 없었다" "이번 대회 자신이 있다"는 등 적당한 허풍(?)과 과장, 특유의 사람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습니다. 당구 깨나 친다는 동네 고수들과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김경률의 인터뷰 기사는 출고되지 못했습니다. 우승을 하면 작성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승까지는 올랐지만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꼭 딸게요' 지난 2010년 전국체전 당시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다짐하는 모습.(자료사진=김동욱 기자)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을 앞둔 전국체전에서는 후배 기자가 인터뷰 기사를 냈지만 역시 목표했던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해 당구 월드컵 2회 우승을 이룬 터라 기대감이 높았지만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동메달의 아쉬움을 씻지 못했습니다.(당시 저는 타 방송사에서 근무할 때인데 어쨌든 인터뷰를 해서 TV 뉴스에 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 김경률은 세계 무대에서 깜짝 놀랄 만한 낭보를 전해오지는 못했습니다. 최성원, 강동궁, 조재호 등 다른 선수들에 다소 밀리는 모양새였습니다. 꾸준히 성적을 내긴 했지만 이제 김경률도 지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 뇌리에서도 잊혀지는 듯했습니다.
▲故 이상천 회장의 뒤를 이렇게 잇다니…그러더니 이렇게 경천동지할 소식으로 나타난 겁니다. 김경률의 비보는 한국 당구계에 큰 아픔이자 막대한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당구계를 주름잡았던 고(故) 이상천 전 연맹 회장 이후 또 한번 큰 별이 불의의 죽음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 전 회장은 1992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당구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2회 우승을 이루며 세계 랭킹 1위까지 올랐습니다. 그를 기리는 추모 대회인 '상 리 인터내셔널'이 지금도 열릴 정도로 세계 당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이 김경률입니다. 지난 2010년 이 전 회장 이후 무려 18년 만에 한국인의 당구 월드컵 우승의 맥을 이었습니다. 다만 이 전 회장처럼 세계 1위는 아쉽게 이루지 못했고, 2위까지 올랐습니다.
'김경률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한국 당구는 김경률의 2010년 월드컵 2회 우승 이후 최성원, 조재호 등도 월드컵을 제패하는 등 신흥 강호로 거듭났다. 최근에는 김행직(왼쪽부터 시계 방향)이 최연소 아시아선수권 우승을 이루는 쾌거도 이뤘다.(자료사진=대한당구연맹)
김경률의 우승은 한국 당구계에 대단히 큰 의미를 안겼습니다. 우리도 당시 세계 당구계의 대세이던 유럽을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긴 겁니다.
이 전 회장이 미국 시민권자로 어릴 때부터 세계 강호들과 겨뤄온 반면 김경률은 국내에서 기량을 갈고 닦은 토종 선수였습니다. 이런 김경률이 당시 세계 당구 '4대 천왕'인 딕 야스퍼스(네덜란드), 다니엘 산체스(스페인), 토브욤 브롬달(스웨덴). 프레데릭 쿠트롱(벨기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김경률에 자극을 받은 선수들이 이후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최성원이 2012년, 조재호가 지난해 터키 월드컵에서 정상에 올랐고, 2013년에는 강동궁이 수원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여세를 몰아 최성원은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정상에 오르며 랭킹 1위까지 올랐습니다.
특히 최성원은 세계캐롬연맹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까지 올랐습니다. 한국인으로는 이 전 회장도 이루지 못한 최초의 영예입니다. 김경률의 자극이 없었다면 이뤄지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쾌거입니다. 김경률은 생전 부산 당구 고수였던 최성원과 첫 대결에서 완패한 뒤 이를 막물었고 한국 당구 1인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다른 선수들이 김경률을 따라잡겠다고 나섰고, 버금가는 위치에 선 겁니다.
▲'자살? 실족사?' 김경률을 잃었다는 게 중요하다그의 사인은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고양경찰서는 당초 "타살 흔적이 없다"면서 "자살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최근 주춤했던 그의 성적과 사업 상황까지 맞물려 추측성 기사가 쏟아졌습니다.
(저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워낙 관심이 큰 사안이다 보니 일단 회사의 경기도 출입 기자가 경찰서 관계자를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사를 썼습니다. 단순 사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고 자실도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뉘앙스를 적잖게 풍겼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족과 연맹은 자살이 아닌 단순 실족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내릴 이유가 도무지 없는 데다 고인의 명예가 걸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자살에 실과 바늘처럼 붙는 유서의 흔적도 없는 까닭입니다. 연맹 관계자에 따르면 경찰은 유족의 완강한 주장에 당초 입장을 바꿔 원점에서 재수사를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고 합니다.
사인이 어떻든 간에 한국 당구계와 팬들, 더 나아가 한국 스포츠는 큰 인물을 잃었습니다. 끝내 이루지 못한 고인의 세계 랭킹 1위의 꿈을 아쉬워 하면서 이 기사를 '한국 당구 선구자' 김경률에게 바칩니다.
p.s-2008년 당시 김경률은 역시 당구로 숱한 밤을 지새웠던 제게 농담삼아 "언제 한 게임 치시죠"라고 말했습니다. 대학 시절 한때 좀 한다고 했던 저에게는 언감생심, 세계에서 노는 고수와 언제 한번 겨뤄보겠느냐 생각에 잠깐 설렜던 기억이 아슴푸레 떠오릅니다.
기자 체면에 대패 망신을 당할 것 같아 "조만간 합시다" 하며 얼버무렸던 것 같은데 끝내 함께 큐대를 들지 못했습니다. 뒤늦게나마 약속해봅니다.
"김 형, 꼭 한번 칩시다. 내 생전에 김 형과 맞설 정도로 실력 한번 키워보겠소. 먼저 가 계시오. 조금 늦더라도 정말로 즐겁게 한 게임 쳐봅시다. 부디 잘 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