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전체메뉴보기

[칼럼] 세상과 이별할 용기, 죽음을 선택할 자유



칼럼

    [칼럼] 세상과 이별할 용기, 죽음을 선택할 자유

    위 사진은 기사와 관련이 없음 (사진=자료사진)

     

    청년 '라몬 삼페드로'. 그는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한 후 자살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알약을 입어 넣을 수도, 컵에 든 물을 마실 수도 없는 전신장애자였기 때문에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던 죽음에 이르렀다.

    라몬은 선박 수리공으로 일하며 전 세계를 누빈 꿈 많은 청년이었다. 25세 되던 해 다이빙을 하다 목뼈를 다쳤다. 그 후 라몬은 침대에 누워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지 못하고,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전신마비자의 슬픔과 분노와 절망 속에 살아야 했다. 그는 평생 침대에 누워 눈만 껌뻑이며 고통과 절망 속에 보내야하는 자신에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안락사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스페인 법원은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몬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도 결국은 삶의 한 부분입니다. 만약 재판을 하면 그들은 나에게 왜 장애를 극복할 방법을 찾지 않느냐고 물을 겁니다. 휠체어를 받아들이는 건, 희망의 부스러기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거기 앉아 있고 나와는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지만 나에게는 당신에게 다가갈 수도, 당신을 만질 수도, 극복할 수 없는 거리입니다. 내겐 그저 환상일 뿐이죠."

    1998년 1월 라몬은 스스로 존엄하게 죽을 수 없다는 법의 잣대를 피해, 친구의 도움을 받아 세상과 이별한다. 사후 그 사실이 알려지자 스페인은 물론 유럽 전역에서 존엄사를 둘러싼 뜨거운 찬반논쟁이 일어났다. 라몬의 불꽃같던 생애는 2004년 영화 <씨 인사이드="">(The Sea Insids)로 만들어져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인간의 존엄사 논쟁에 불을 붙였다.

    2012년 개봉된 영화 <아무르>. 이 역시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한 성찰과 질문을 동시에 던진다. 고령의 부부가 행복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아내 '안'에게 치매가 찾아오고 반신불수가 된다. 음악가였던 이들의 젊은 날은 고결하고 품위 있고 사랑스러운 나날이었다. 아름다운 시절은 풀에 핀 꽃처럼 시들었고 피아노 선율처럼 사라진 것이다. 남편 '조르주'는 반신불수가 된 아내를 정성껏 돌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고통 속에 절망만 쌓여간다. 조르주는 어느 날 결심한다. 누워 있는 아내 얼굴 위에 베개 올려놓고 바위처럼 누른다. 세상과 작별을 고하고 평화로운 영혼이 되어 새처럼 날 수 있도록. 집 밖의 세상에서 존엄사는 불법이기 때문에…

    몇 년 사이 존엄사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인간의 생명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그 자체로 무한한 가치가 있다고 믿어온 절대 존엄성 때문에 존엄사는 정당화 될 수 없었다. 이제는 자기 자신의 신체와 생명, 죽음에 관한 권리는 스스로 가질 수 있다는 쪽으로 방향이 틀어지고 있다. 단 의학의 힘을 빌려 연명해야 하는 불치의 환자일 경우지만.

    대한민국도 '웰다잉(Well-Dying)법'이라 불리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했다. 최근 서울대 의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존엄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연명의료 지속여부를 환자가 결정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는 데 대해 80%가 찬성했다. 가족과 병원이 최선을 다했음에도 치료할 수 없는 환자에게 인간답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는 공감대가 생겨나고 있다.

    그런데 만일 나의 가족 중 누군가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고 회복불능 상태에 빠진다면, 치매에 걸려 인격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팔과 다리에 링커를 주렁주렁 꽂고, 인공호흡기를 쓰고, 의식이 없어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도 모른 채 뼈만 앙상하게 남은 흉한 몰골로 누워, 어떤 기적과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시한부 환자의 정신이 맑고 얼굴에 생기가 돌고 미소 지을 힘이 있을 때, 가족들과 함께 슬프지만 품위 있고 따뜻한 이별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통증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혹은 아무 의식도 없이 송장처럼 누워 있다가 호흡이 멎을 때까지 생명의 존엄성에 기대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며 기다리는 쪽을 선택할까?

    머리 숙여 곰곰이 생각해 본다… 죽음도 삶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인생의 과정인 것처럼, 세상의 모든 빛과 이별한 후에는 하나님의 몫인 것처럼… 품위 있는 고별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시각 주요뉴스


    Daum에서 노컷뉴스를 만나보세요!

    오늘의 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댓글

    투데이 핫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