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속사정이 궁금하다. 뉴스의 행간을 속 시원히 짚어 줍니다. [Why뉴스]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를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김현정의>
■ 방송 : 권영철의 Why뉴스
■ 채널 : 표준 FM 98.1 (07:3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권영철 CBS 선임기자
긴급조치에 대한 대법원의 판례를 반박하는 하급심들의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대법원의 판결이 법리에 맞지않는 정치적 성향이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래서 오늘 [Why뉴스]에서는 "하급심들 왜 대법원의 판결을 반박하나?"라는 주제로 그 속사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박정희 대통령 가옥(등록문화재 제412호)에 전시된 박정희 전 대통령 유품 (사진=황진환 기자)
긴급조치(緊急措置)는 1972년 개헌된 유신 헌법 53조에 규정되어 있던, 대통령의 권한으로 행사 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를 말하는 것이다. 긴급조치는 1974년 1월 8일 1호를 시작으로 1975년 5월 13일 9호까지 아홉차례에 걸쳐 공표되었고, 그 내용은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 시키는 어쩌면 전제군주와 버금가거나 능가할 정도의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 조치였다.
'10월 유신'은 1972년 10월 17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위헌적 절차에 의한 국민투표로 1972년 12월 27일에 제3공화국 헌법을 파괴하고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헌법을 유신 헌법이라 하며,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 또는 '유신독재'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에서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 1(유정회)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 및 국회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횟수의 제한 없이 연임할 수 있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쥐고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조였다.
긴급조치 9호는 아홉차례 긴급조치의 종결판으로 유신헌법의 부정, 반대, 왜곡, 비방, 개정 및 폐기의 주장이나 청원, 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75년 5월 시행돼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해 폐기될 때까지 무려 4년이나 지속됐고 이 기간 800명이 넘는 지식인과 학생들이 구속됐다.
▶ 긴급조치 9호는 이미 위헌 결정이 났지 않나?
지난 2013년 헌법재판소가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시정 제정된 유신헌법 53조에 근거한 긴급조치 1,2,9호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사진=윤창원 기자)
= 그렇다. 긴급조치 9호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 이미 위헌이고 무효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따라서 긴급조치에 의해 처벌받은 형사사건은 재심에 의해서 무죄가 선고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3년 4월 18일자 2011초기689 전원합의체) '긴급조치 9호'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긴급조치)는 그 발령의 근거가 된 유신헌법 53조가 규정하고 있는 요건을 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이자 유신헌법과 현행 헌법이 규정한 표현의 자유, 영장주의와 신체의 자유, 주거의 자유, 청원권, 학문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므로 위헌·무효라고 결정했다.
문제는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니까 이를 근거로 처벌을 받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는데 대법원이 국가의 배상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한 것이다.
대법원은 "긴급조치 발령행위는 고도의 정치행위이므로 정치적 책임은 물을 수 있지만 국민 개개인에 대하여 국가배상 책임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결을 했다. (대법원 2014.10.27.선고 2013다217962판결, 2015.3.26.선고 2012다48824판결)
▶ 위헌이고 형사재심사건에서 무죄가 선고됐는데 배상책임은 없다는 게 말이 되나?= 그래서 긴급조치 또한 입법행위이므로 정치적 책임만 있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한 원로 법조인은 "대법원이 위헌이라고 전원합의체에서 결정을 했는데 소부에서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결한 것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할 수 없다'는 주장과 같은 논리"라고 반박했다.
민변 긴급조치 변호인단의 간사를 맡고 있는 조영선 변호사는 "대법원의 이 판결은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과 헌법재판소 결정, 수많은 행사재심 무죄판결의 취지를 뒤집는 정치적 선언"이라면서 "국가의 무오류 무책임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 하급심들이 대법원의 판례를 반박하는 판결을 하고 있다는 거냐?
지난 2013년 헌법재판소가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시정 제정된 유신헌법 53조에 근거한 긴급조치 1,2,9호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사진=윤창원 기자)
= 그렇다. 사실 대법원이 "긴급조치 발령행위는 고도의 정치행위로서 국민 개개인에 대하여 국가배상 책임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결한 것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대법원의 판결이 강한 보수화 색채를 띠고 있는 와중에 나온 판례다.
또 하급심에서는 이 판례에 따라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국가배상 청구를 기각해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긴급조치 변호인단은 "하급심 판결들은 과거 1970년대 긴급조치 판결들이 그러하듯이 고뇌 없이 손쉽게 '정찰제 기각판결'을 해왔다"고 논평했다.
그런데 이 대법원 판례를 무조건 따르지 않고 반박하는 하급심 판결이 지난해 두 차례에 이어 올해도 이어지고 있어서 법원 내부에서도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광주지법 민사합의13부(부장 마은혁)는 지난 4일 긴급조치를 비방하는 유인물을 제작ㆍ배포한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던 당시 전북대 대학생 손모씨 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대통령 1인의 판단으로 행해진 긴급조치 발령은 법적 책임을 묻지 않고 정치적 책임만을 추궁하는 국회의원의 입법행위와 동일시할 수 없는데도 대법원이 국회의 입법행위에 관한 기존 법리를 무비판적으로 불완전하게 원용한 잘못이 있다"고 비판했다. 긴급조치 발령은 유신헌법에 따라 부여된 권한을 직접 행사한 대통령의 직무집행행위이고, 이는 옛 국가배상법에서 정하는 직무행위라는 얘기다.
재판부는 특히 "이제 와서 위헌성을 부인하는 것은 대법원이 전원합의체로 내린 긴급조치 위헌결정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1부도 지난해 9월 "헌법에 명백히 위반되는 긴급조치 발령은 대통령의 헌법 수호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고의 내지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라며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했고, 지난해 2월 광주지법 목포지원 민사1부도 "위헌성이 중대하고 명백한 긴급조치가 발령되고 집행됐으면 개별 공무원의 과실이 없더라도 국가의 불법"이라며 "그렇게 해석 안 되면 국가는 형식적 법치주의 논리 아래 중대한 위법을 저지르고도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고 밝혔다.
▶ 궁금해서 그러는데 1심이나 2심 같은 하급심에서 대법원 판례와 다른 판결을 내리면 안 되는거냐?
(이미지=스마트이미지 제공)
=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대법원의 판례가 하급심 판결의 기준이 되고 방향이 되긴 하지만 헌법이나 법률처럼 명문화된 법규는 아니다. 법원조직법 제8조(상급심 재판의 기속력) "상급법원 재판에서의 판단은 해당 사건에 관하여 하급심(下級審)을 기속(羈束)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대법원 판례와 다른 판결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규정이나 관례에 어긋나는 건 아닌 것이다.
대법관은 지낸 박시환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의 전임 석좌교수는 "법관은 독립해서 판결하는 독립기관이므로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지만 따르지 않더라도 잘못되거나 나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법관은 오히려 "대법원 판례와 다른 판결을 한다고 이를 '반기를 든다'거나 '돌출적인 행위'로 보는 시각이 사법부를 죽이는 최악의 반응"이라며 "그런 하급심을 대법원의 권위에 도전하는 걸로 받아들이거나 비토한다면 대법원 스스로 대법원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 하급심들은 왜 대법원의 판례를 반박하는 거냐?= 대법원 판결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하급심에서 잇따라 대법원 판례를 반박하는 이유는 법리에도 맞지않거나, 대법원 판결이 정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첫 번째는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인정하면서도 배상책임은 없다는 판례가 법리에 맞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수도권의 한 부장판사는 "하급심이지만 대법원의 판결이 법리에 맞지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런 판결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고 전직 사법부 고위관계자도 "판례의 사정거리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대법원의 판결이 정치적 선언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조영선 변호사는 "2015년 3월 26일 대법원 3부의 판결은 유신헌법 및 긴급조치를 정당화하고 옹호하기 위해 졸속적으로 행해진 고도의 정치성을 띤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대법원이 숱한 배상소송건을 배제한 채 소송대리인인 변호인도 없이 개인이 소송을 벌인 소액사건을 끌어다 판결을 했다고 한다. 대법원 3부도 판결문에서 "'대법원의 판례에 상반되는 판단을 한 때'의 요건을 갖추지 아니하였다고 하더라도"라고 이례적인 판단임을 인정하고 있다.
대법원에 계류중인 긴급조치관련 손해배상사건이 4~5백여건에 이르는데 변호인들이 법리적으로 배상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사건들은 배제한 채 소액사건 그것도 변호인도 없이 원고 혼자서 소송을 진행중인 사건을 끌어다 판결한 것은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원론적인 얘기지만 법관은 독립된 기관으로 정당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헌법 103조에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직 부장판사도 "재판부가 독립해서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판단한 것"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 대법원은 어떤 입장이냐?
대법원 (사진=자료사진)
= 대법원에서는 겉으로는 '크게 신경 쓸일이 아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내심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판사의 양심자체가 보편적인 판사로서의 양심을 표현하는 것이지 본인 생각만 맞다는 전제로서의 양심은 아닌데 그 판사님들은 양심자체가 본인생각이 맞다는 전제로 결론을 내고 싶은 게 아닌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 이런 하급심 판결들이 잇따르면 대법원이 판례를 변경 할 가능성이 생기는 거냐?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 아직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들이 많다. 지난해 3월 26일 대법원3부의 판결이후 이 판결에 따라 손해배상을 기각하는 판결이 쏟아지고 있다.
심지어 지난해 9월 서울민사지법11부의 배상판결이 나고 3개월여만에 고등법원에서는 대법원의 판결을 그대로 인용해 원고패소 판결했다.
이례적인 3건의 판결만으로 대법원이 쉽게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대법원의 한 관계자도 "하급심에서 몇 건의 판결이 있었다고 대법원 판례가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박주민 변호사도 "몇 건의 하급심 판결이 있었다고 해서 대법원이 신경을 쓰기는 커녕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을 했다.
그렇지만 전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하급심들이 대법원의 판례에 기계적으로 순응한다면 판례가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어지는 것이다.
박시환 전 대법관은 "대법원의 판례가 변경되는 경우는 중대한 사정변경이 있거나, 법원 내부의 여론과 사회적 여론이 중대하게 작용할 때"라고 말했다.
중대한 사정변경이란 지금은 거의 보수일색인 대법관의 인적구성이 바뀌거나 정권이 바뀌어서 새롭고 다양한 대법관 구성이 가능해 질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대법원 내부가 아닌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므로 지금으로서는 가능성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법원 안팎에서의 여론이 비등하다면 대법원의 판결이 바뀔 수는 있다는 얘기다.
하급심에서 대법원의 눈치만 볼게 아니라 소신있는 판결을 계속 이어가고, 또 사회적으로 언론이나 학계에서 대법원의 잘못된 판결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면 대법원으로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앞으로 언론이나 학계, 법조계 등에서 대법원의 치우치거나 정치적인 판결을 하는 데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문제를 제기한다면 바뀔 수도 있다는 얘기다.
▶ 배상신청을 하는 사건은 어떤 사건들인가?= 시국사건들이 많지만 이른바 '막걸리 간첩'사건도 적지 않다.
17일 법무법인 동화의 이재정 변호사가 서울지방변호사로부터 '명 변호사상'을 받았다. 이 상은 2015년 9월에 있었던 서울지방법원 민사11부의 국가배상 판결을 끌어냈기 때문에 받은 것이다.
(사진=이재정 변호사 페이스북 캡처)
이 변호사는 페이스북에 올린 수상소감에서 "날품팔이 선원으로 납북되었다가 온 삶을 긴급조치에 혹사당한 무학의 내 의뢰인은, 배상이 이루어지면, 큰 아들 늦은 장가라도 보낼 꿈을 꾸고 있었다. 그 가난과 무학의 대물림으로, 긴급조치의 상처는 지금도 진행형이고, 알량한 몇 푼의 피해구제도 현재로선 묘연하다"고 밝혔다.
영장도 없이 체포 구금돼서 오랜기간 수사를 받은 의뢰인들에 대해 대법원이 40여년이 지나서 "긴급조치에 의한 복역 등이 곧바로 국가의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하는 것은 '유신 체제를 정당화 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영선 변호사는 "대법원의 일련의 퇴행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현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의 유신 부활 내지 정당화의 기조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1987년 이후 형성된 민주주의를 짓밟는 유신의 부활이며 사법부의 폭거"라고 주장했다.
이재정 변호사는 "모두가 집중하고 있다. 보편적 법조 상식이 이 판결을 지켜보고 있다"면서 "이제 정치집단으로 취급받기까지 하는 대법원이, 오늘 이 판례를 주목한 서울지방변호사회 법률가들의 기대와 상식을 무시하지 않길 바란다. 보다 많은 하급심의 판사님들이 헌법과 법률, 양심을 져버리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