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한홍구가 대한민국 사법부에 죽비를 내리친다. 그의 책 '사법부'는 이승만 정권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 사법부가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겪은 고통의 순간을 기록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법부가 당한 고통이 전부는 아니다. 사법부는 안기부나 중정을 비롯한 정권과의 관계에서 피해자였지만 시민들과의 관계에서는 살해공범자이자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인권의 최후 보루이자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안식처였던 '법'이 정권의 조력자를 넘어 권력이 되기까지, 대한민국 사법부의 숨겨진 슬픈 역사 70년이 이 책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큰 줄기는 이승만 정권부터 2000년 이후까지 시대 순으로 역사 현장을 따라가며 저자가 골라낸 각 시기별 굵직굵직한 현대사의 사건들을 보여주는 데 있다. 여기에 각 사건들이 어떻게 재판을 받고, 어떤 식으로 판결이 내려졌는지 그 과정이 상세히 서술된다. 안기부의 보고서를 비롯해 재판일지와 판결문, 그리고 한홍구가 직접 당시 재판에 공석했던 판사와 변호사, 피의자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까지 인용되어 있어서 한국현대사의 증언록을 보는 듯하다.
저자는 '사법부'에서 법을 자기 식으로 절대시하고 도구 삼아 비적 행위를 해왔던 '법비'들을 한 명씩 호명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법을 고치거나 추가했던 정권의 지배자들을 비롯해 그에 동조했던 법관들의 실명과 그들의 언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5.16 군사반란 이후 1963년 12월까지의 군정 기간은 법원이 완전히 군부의 통제하에 있었던 사법부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설치해 사법부는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았다. 박정희의 유신헌법에는 "사법부의 목을 죄는 여러 가지 독소조항을 심어놓았"(79쪽)고 "국가관이 없는 판사들이"라는 이유로 판사 재임용에서 대거 탈락시키기도 했다.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해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101쪽)는 일도 다반사였다.
정권은 법관들을 협박하고 좌천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판결이 나도록 서슴지 않았다. 가령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군법회의에서 변론 중 자신은 "직업상 이 자리에서 변호를 하고 있으나 차라리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하여 피고인석에 앉아 있고 싶은 심정"(226~227쪽)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휴정 중에 옆방으로 불려가 잔뜩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7월 15일 법정에서 한 변론을 문제 삼아 법정모욕죄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또한 "정식재판도 아닌 즉심에서 정권의 뜻을 거슬러 인사조치 된"(200쪽) 박시환 판사도 있었다. 그는 1985년 인천공단 가두시위 관련자들 11명에게 무죄를 내렸다는 이유로 안기부의 압력을 받고 결국 춘천지법으로 좌천됐다. 법을 수단 삼아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늘리려는 권력 투쟁이 사법부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한홍구는 사법부의 70년 역사를 심판대 위에 올려놓는다.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하겠다는 법관들의 다짐이 얼마나 지켜졌는지 시비를 가려 보자는 것이다. 물론 사법부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사법부를 지키려다 지병이 도져 한쪽 다리를 절단했던 김병로 대법원장이 있었는가 하면, 사법부를 군대의 범무감실 정도로 여겼던 박정희 정권을 서슴지 않고 도우며 "유신체제는 가장 좋은 제도"(128쪽)라고 말했던 민복기 대법원장도 있었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과거 선배들의 판결을 사죄하며 과거 청산을 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취임사에서 발표했지만 충분히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대법원장 외에도 사법파동에 동참하거나 소수의견을 냈던 판사들을 비롯해 소신껏 피의자들의 입장을 대변했던 변호사들이 많았다. 화이트칼라에게 유독 엄격해 석 달 동안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를 30여 건이나 정식재판에 회부했던 박태범 판사, 제1세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시국사건을 도맡았던 조준희 변호사,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눈물 없이는 상기할 수 없는 '권 양의 투쟁'"을 눈물을 쏟아가며 변호했던 조영래 변호사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홍구는 이 책의 적지 않은 부분을 안기부의 압력 속에서도 양심적 판결을 내리고 변호했던 정의로운 법관들의 이야기로 채웠다. 이러한 분들은 사법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동시에 다시 법과 정의가 무엇인지 물으며 사법부의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법원에는 수많은 과거사 사건, 특히 조작간첩 사건들이 재심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유죄를 내렸던 사법부에 다시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 인혁당 사건(2007), 오송회 사건(2008), 아람회 사건(2009), 김근태 고문 사건(2014) 등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뒤늦게나마 억울함을 벗었지만 고통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사법부>에는 사법살인으로 짓이겨진 수많은 피해자들의 사연이 담겨 있다.
저자 한홍구는 '사법부'가 박제된 역사를 다루는 책으로 머물길 원치 않는다. 이 책이 세상에 나가 과거를 흔들어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실제로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의 경우, 저자의 노력으로 재심에 들어갔고 2009년 8월 28일 결국 무죄를 받았다. 책을 마무리하는 중에는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으로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썼던 한경희 씨의 아들 송기수 씨가 '한경희 통일평화상'을 제정해 억울하게 고통 받는 수많은 '한경희'들 명예회복 길을 열겠다고 했고, 지난 3월 16일 첫 수상자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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