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셔먼호가 불길에 휩싸였을 때, 그 긴박한 순간에도 토마스 선교사는 성경책을 품고 배에서 나왔다. 그를 향해 창을 겨누는 병사에게 ‘야소!(예수)’를 외치며 성경책을 건넸고, 그는 곧 죽음을 맞았다. 1866년 9월 5일,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 그러나 그의 죽음은 조선 땅에 복음을 심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한 청년의 무모한 도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가 죽은 이후 조선에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활발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이 열리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기적과 같은 부흥이 일어나는 단초가 되었다.
'조선에 부르심을 받다'의 저자 스텔라 프라이스는 토마스의 순교가 주님의 지상명령을 이루기 위한 순수한 열정이었고, 그가 순교한 지 150주년이 된 지금,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한국 교회의 성장을 바라볼 때 그가 전한 성경책, 그가 흘린 피가 얼마나 귀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영국 웨일스 출신으로 미국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저자는 토마스 선교사의 일대기를 추적하기 위하여 미국과 영국 웨일스 등을 오가며 관련 인물들을 만나고, 오래된 귀한 자료들을 수집한 끝에 이 책을 써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 선교사가 자신의 소명에 순종하여 순교하기까지의 개인의 헌신을 주된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그동안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연구가 국내의 여러 학자, 목회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이루어졌지만, 이 책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의 시각에서 바라본 당시 중국과 한국의 선교 상황에 대해 다루고 있고,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를 세우는 씨앗이요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토마스 선교사 기념 예배당에 있는 주춧돌에는 이러한 문구가 쓰여 있다. 영국에서 중국으로, 그리고 한국으로 부지런히 움직인 토마스 선교사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학창 시절부터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전하겠다는 소명이었다. 그는 목회자였던 아버지와 그의 주변에 있던 영적 스승들에게서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배웠고, 그 열정은 낯선 땅, 아직 문호가 개방되지 않았고 종교적 박해가 심했던 조선 땅으로 그를 인도했다.
그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그 열정을 다 나누지 못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까지 조선 땅에 뿌렸던 성경은 이후 많은 이들을 복음화시켰고,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미국과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조선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언더우드, 새뮤얼 모펫 등의 선교사들이 조선 복음화를 위해 들어왔고, 이후 교회가 세워지고 평양 대부흥이 일어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무모하리만치 뜨거운 열정이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나서게 했고, 그로 인해 조선의 수많은 성도들은 전 세계 기독교사에 길이 남을 평양 대부흥의 역사를 일구어 낼 수 있었다.
영국 출신으로 미국에 살던 스텔라 프라이스와 그의 남편 스티븐 프라이스는 고향 웨일스를 찾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웨일스 흘라노버에 있는 한 교회를 방문하게 된다. 이들은 이 교회에서 한국 지도와 토마스 선교사의 사진을 보았고, 머나먼 동양의 복음화를 위해 떠났다가 그곳에서 순교한 한 젊은 선교사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스텔라 프라이스는 토마스 선교사의 삶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 그의 삶을 추적하여 이 책을 쓰게 되었고, 지금은 토마스 선교사가 어린 시절을 보낸 하노버 사택을 구입하여 그곳에서 살면서 남편과 함께 엠마오 길 사역에 전념하고 있다.
미국에서 인정받는 의사였던 스티븐 프라이스 박사는 토마스 선교사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 토마스 선교사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과 북한에 의료 선교를 가게 되었고, 이후 북한 선교와 세계 선교에 헌신하는 삶을 선택했다.
◇ 본문 중에서토마스도 마지막으로 남은 성경 한 권을 가슴에 품고 배에서 뛰어내렸다. 강가로 거칠게 끌려 나온 그는 대동강 백사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슴에 품고 있던 성경을 꺼내 바로 앞에 서 있는 관군에게 내밀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순간, 그 병사는 주춤했으나 이내 그의 칼은 토마스의 가슴을 꿰뚫었다. 꽃다운 나이 스물일곱,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9월 5일.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토마스를 죽인 그 병사는 토마스 옆에 떨어진 책을 주워들었다. 그는 그것이 성경인 줄도 모르고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늘 서양사람 하나를 죽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에 웃으면서 책 한 권을 내밀며 받으라고 권했다. 결국 그를 죽이기는 했지만, 그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가지고 왔다."
제너럴셔먼호는 완전히 불태워졌고, 토마스 선교사의 시신은 평양 근처 대동강변에 묻혔다.
1928년 《도마스 목사전》을 쓴 오문환 장로는 당시 이 광경을 목격했던 한 청년으로부터 토마스의 죽음의 순간에 대해 전해 듣고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토마스는 죽기 전에 홀로 뱃머리에서 용감하게도 '야소(예수)'를 외치고 남은 성경을 뿌렸다."
―<제너럴셔먼호의 최후=""> 중에서
복음에 헌신했던 토마스의 생애는 짧았지만 눈부셨다. 토마스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헌신은 미미해 보였을지 몰라도, 그가 떠난 후에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1932년에 세워진 토마스 선교사 기념 예배당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가 기부한 주춧돌이 세워졌는데, 거기에는 이러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를 세우는 씨앗이요.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조선인들의 마음속 깊이 심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조선 땅을 구원하시기 위해 토마스를 택하셨다. 토마스가 조선에 부르심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조선의 제자들이 온 세계를 향하여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를="" 세우는="" 씨앗이요=""> 중에서
이 책을 쓰는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다. 토마스 선교사의 생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이 분명 흥미진진하리라 생각된다.
하노버 사택은 토마스 선교사의 부모님이 37년간 목회를 하고 은퇴할 때까지 계속 살았던 집이다. 토마스 선교사가 태어난 지 17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남편 스티브와 함께 토마스 선교사가 어린 시절을 보낸 바로 그 옛집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토마스 가족들이 식사를 했던 그 부엌에서 식사를 하고, 토마스의 아버지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며 기도하던 작은 서재에서 책을 읽는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략)
지난 주일에는 10여 명의 한국 청년들이 우리 집 마당을 거닐며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또한 60여 명의 웨일스인과 한국인들이 함께 모여 하노버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 모든 것은 조선에 건너가 복음을 전파했던 토마스 선교사 같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땅에 심어 놓은 씨앗이 자라 오늘의 한국과 웨일스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저자후기. 하나님께="" 나의="" 작은="" 헌신을="" 바치며=""> 중에서
저자후기.>순교자의>제너럴셔먼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