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룡 금융위원장이 26일 오전 서울 태평로 금융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3차 경쟁력 강화 및 구조조정 협의체' 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임 위원장은 대우조선에 대해 추가적인 인력감축을 요구했다. 황진환기자
정부가 26일 구조조정 계획을 밝힌 직후 대우조선노조 조현우 정책기획실장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조선사 통폐합이라는 최악의 사태는 피했지만,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대우조선해양에 대해 “보다 강도 높은 인력감축을 해야한다”고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조 실장은 “위기의 원인이 사람(노동자)에게 있지 않는데 사람의 문제(노동자 해고)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며 “정부가 제시한 내용(추가 인력감축)이 너무 두루뭉술하게 나와서 그 진의나 내용을 파악 중”이라고 말했다.
비단 대우조선노조 뿐 아니라 구조조정 대상으로 거론된 노조들은 이번 정부의 구조조정 계획 발표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곧 괜찮아지겠지’하고 구조조정을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은 막판에 대규모 정리해고로 마무리되는 우리나라 구조조정의 아픈 경험들 때문이다.
◇ 기승전..'해고', 구조조정의 공식1997년 IMF 경제위기 당시가 그랬고, 주주들에게 1백억원이 넘는 배당을 하면서도 경영상 어려움을 내세워 수백명을 정리 해고한 한진중공업 사태가 그랬다. 기술만 쏙 빼간 중국 상하이차 경영진의 잘못을 고스란히 책임져야 했던 쌍용차 정리 해고 사태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고 잘못된 구조조정의 기억은 2016년 또다시 재현되고 있다. 이번에는 한진해운 대주주들이 주식을 전량 팔아치우면서 침몰하는 배에서 먼저 빠져나갔다. 또 대우조선 고재호 전 사장이 3조원의 부실을 숨겨놓고는 지난해 퇴직금을 포함 무려 21억5400만원의 급여를 받아간 사실도 새삼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결국 책임은 고스란히 남은 자들의 몫이 됐다.
금융당국은 한진해운 주요 주주였던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 일가가 자율협약 신청 발표 직전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한진해운 주식을 매각하고 손실회피를 했는지를 조사하기로 했다. 사진은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진해운 본사의 모습. 황진환기자
아니나 다를까, 이날 ‘3 트랙’으로 분류된 정부의 구조조정 계획에는 인원 추가감축, 즉 해고에 대한 요청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기업을 부실하게 만든 경영진과 대주주의 책임, 그동안 구조조정을 미뤄온 채권단의 책임은 어떻게 물을 것인지에 대한 방안은 없었다.
남아있는 직원들에게만 기업 부실의 책임을 떠넘기는 구조조정의 행태가 또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 게다가 실직의 위기에 놓인 종사자들에 대한 대책은 조선업에 대한 특별고용지원업종 지정 뿐이었다.
◇ 구조조정 성패로 떠오른 실업대책, "알맹이가 없네"사실 이번 구조조정은 ‘기업을 살리는’ 구조조정 대책과 ‘사람을 살리는’ 실업대책이 동시에 하나의 패키지로 제시돼야 했다. 이번에 다수를 점한 야당이 강력한 실업대책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앞서 "실업대책이 뒷받침된 구조조정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김 대표의 발언을 계기로 부실업종 구조조정이 급물살을 탔고, 여야정 협의체 구성도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구조조정 대책에서 충분한 실업대책이 담겨있다고 말하기는 민망한 수준이다. 구체적인 계획도 아직 세워지지도 않았고, 현장 실사를 벌이고 있는 고용노동부 관계자조차 “현재는 윤곽도 나오지 않은 상태”라고 실토할 정도다.
대우조선해양 노동자들. 조선업은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될 전망이지만, 아직 구체적인 내용은 없는 상황이다.(사진 제공=대우조선노조 홈페이지)
구조조정으로 얼마만큼의 실업이 발생하고 이들을 어떻게 다시 취업시킬 것인지, 이에 따르는 비용은 어느 정도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 채 구조조정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면서 정부는 실업대책으로 그동안 야당이 줄곧 반대해왔던 노동4법의 조속한 입법까지 촉구하고 나섰다.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을 정부재정이나 한국은행의 금융중개지원대출로 끌어오겠다는 계획은 새누리당이 총선과정에서 제시한 ‘한국형 양적완화’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새누리당 이혜훈 국회의원 당선자조차 “새누리당이 1당을 놓치면서 실행이 불가능하게 됐다”고 말한 죽은 카드를 꺼내들었다.
구체적인 실업대책은 아직 수립도 되지 않았고, 야당이 반대해온 노동4법 입법이나 한국형 양적완화를 앞세운 정부의 구조조정 계획은 야당의 협력이 아닌 반발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 초반부터 과감하게..자금지원은 실업대책에 집중해야
대주주나 경영책임자는 빠져나가고 남아있는 노동자들과 국민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구조조정의 공식을 깨야한다는 여론은 날로 커지고 있다. 정부가 뒷짐지고 미적대다 결국 노동자들의 대량실업 사태로 마무리할 것이 아니라 초반부터 과감한 구조조정 계획을 내놔야 한다는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구조조정 계획안은 점진적 형태인데 현재 해당업종의 부실이 심한 상태라 이를 계속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라면서 “특정 시점에 가도 문제가 해결이 안 될 경우, 과감한 형태의 비상계획을 정부가 제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성 교수는 특히 “대규모 실업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근로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형태의 자금지원이 미리 준비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기왕에 자금을 지원한다면 실업대책에 자금이 집중돼야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부수적으로 경기도 살리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대주주나 경영책임자는 먼저 빠져나가고 남아있는 노동자들만 실직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그리고 그 사회적 비용은 국민 전체가 져야하는 구조조정 방식을 언제까지 답습할 것인가. 이번에 정부의 구조조정 계획 발표 이후, 이 질문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는 한층 더 가열될 전망이다.{RELNEWS: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