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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사람은 푼돈 몇 푼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치지는 않는다"



책/학술

    나폴레옹, "사람은 푼돈 몇 푼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치지는 않는다"

    신간 '나폴레옹:야망과 운명'

     

    나폴레옹은 어떻게 권력을 장악했나? 신간 '나폴레옹:야망과 운명'의 저자 프랭크 매클린은 인간 심리의 깊은 이해를 들고 있다.

    저자는 나폴레옹이 병사들에게 사랑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정치 선전가로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로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든다.



    1799년 11월 9일에 나폴레옹이 감행한 브뤼메르 쿠데타는 그를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로 만들어주었으며 장차 황제로 나아가는 길에서 첫 번째 관문이었다.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폐지한 뒤 제1통령에 임명된 나폴레옹은 국민 투표를 통해 자신의 신임을 확인했다. 투표 결과는 나폴레옹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혁명이 일어난 지 10년 만에 프랑스인들은 1인 통치를 받아들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제 나폴레옹은 명목상으로는 아니지만 실제로 독재권을 장악했다. 프랑스 국민은 평화와 안정이 자리 잡고 불확실성을 끝내기를 절실히 원했기에 일인 통치에 동의했다. …… 총재정부는 자코뱅주의에 상처를 입혔지만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했으며, 1789년 이래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렸는데도 자유, 평등, 우애에 거세게 반대한 것으로 보였다. 권위, 위계, 질서에 헌신하는 현실주의자요 조정자인 한 남자가 뚜렷한 목적을 갖고 말에 올라탄 채 등장했을 때 전반적인 안도감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프랑스 국민, 달리 말하자면 국민의 상당수는 나폴레옹의 확실한 일 처리에 감명을 받았으며 나폴레옹이 헌법의 미묘한 뜻을 무시해도 개의치 않았다. 역사적 필연이 나폴레옹을 보낸 것 같았다. - 374~375쪽·10장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나폴레옹을 움직인 내적 동기 중에 어머니에 대한 혼합감정을 빼놓을 수 없다. 어린 나폴레옹에게 어머니는 자상함과 거리가 먼, 무섭고 엄격한 훈육자였다. 나폴레옹이 하루에 18시간을 꼬박 일하고 공부하는 일벌레가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미워했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코르시카에서 나폴레옹 일가의 후원자였던 마르뵈프 백작)와 불륜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혼합감정은 나폴레옹이 첫 번째 결혼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하는 대상을 택하게 만들었다. 전도유망한 젊은 장군 나폴레옹이 열정적으로 사랑한 ‘조제핀’은 그보다 6살이 많았고 한 번 결혼한 경력이 있었으며(남매를 두었다) 아름다움이 퇴색해 가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조제핀은 사교계에서 화려한 남성 관계로 유명했다. 나폴레옹은 왜 조제핀과 결혼했을까?

    나폴레옹은 나이가 많고 성적으로 문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 독특한 어머니 콤플렉스에 사로잡혔음을 증명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분열된 감정의 대상인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존경하지는 않았으며, 그 주된 이유는 어머니의 부정이었다. 나폴레옹이 데지레가 아닌 조제핀을 선택한 데에는 분명 이런 사실이 뿌리 깊이 숨어 있다. 데지레는 나폴레옹이 파리에 머물며 오랫동안 자신과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거의 신앙에 가깝게 나폴레옹에게 충실했던 어린 소녀였으므로 필요한 속성을 갖추지 못했다. 반면 부정한 어머니와 성향이 같은 조제핀은 나폴레옹의 무의식에 깊이 감추어진 충동을 모조리 충족시켰다. - 186쪽·6장 파리의 수호자

    영국의 역사가 프랭크 매클린은 나폴레옹이 직접 쓴 글과 나폴레옹의 친구와 적들이 남긴 회고록, 나폴레옹 당시부터 현재까지 나온 수많은 나폴레옹 연구서를 비판적으로 참고하여 매우 객관적이고 충실한 전기를 완성했다. 특히 1760년대부터 1820년대까지 프랑스 국내 정치는 물론이고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 오스만튀르크, 이탈리아 등 유럽의 복잡한 정치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함으로써 나폴레옹과 그의 시대를 좀 더 폭넓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어떤 역사가들은 나폴레옹을 프랑스 혁명의 계승자로 내세우면서 나폴레옹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군사적 승리로써 자신이 지배한 유럽 지역에 ‘자유, 평등, 우애’라는 대혁명의 신조와 이념을 전파했다고 평가했다. 그러한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1804년에 공포한 프랑스 민법전,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Napoleon Code)’이다. 나폴레옹은 훗날 세인트헬레나에서 민법전을 자신이 이룬 진정한 업적으로 꼽았다. “마흔 번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는 워털루의 패배로 사라졌다. 그러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 있다. 바로 나의 민법전이다.”



    나폴레옹이 예견한 것처럼 나폴레옹 법전은 지금까지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적 성과(법 앞의 평등, 소유권 보장, 개인의 자유)를 담은 민법전이 나폴레옹 통치기에 프랑스의 모든 지배 영역에 전파되면서 결과적으로 서유럽 자유주의 혁명의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한 나폴레옹 법전이 뿌리를 내리면서 근대 시민 사회와 자본주의 발달이 가능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매클린은 이러한 사후 평가와 상관없이, 나폴레옹이 프랑스 외부에서 행한 일은 자유와 평등의 전파와 거리가 멀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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