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자료사진)
조선 시대 궁궐 입구 가까운 곳에는 오늘날 교통 표지판에 해당하는 '하마비(下馬碑)'로 불리는 비석이 있었다. 비석에는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리시오'라는 의미의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가마나 말은 고관대작들이 사용하는 교통수단이다. 주인이 탈 것에서 내려 관가에 볼일을 보러 간 사이 마부나 가마꾼들은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려 잡담을 나누게 되는데 주인들이 모두 높은 벼슬아치이다 보니 이들의 승진이나 인사 관련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마부나 가마꾼들이 오가며 주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교류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정보와 소문을 얻게되고 이것이 주인에게 전달되는 것은 물론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 인사에 영향을 미치는 일까지 생겼다. 마부와 가마꾼들의 이야기로 모아진 하마평은 세인의 흥밋거리기도 하면서 여론이 돼 인사권자에게 전달된 것이다.
오늘날 관직의 이동이나 승진을 앞두고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나 소문을 하마평에 비유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10여년 전만 해도 개각은 물론 정부 부처나 주요 기관의 인사를 앞두고 언론은 경쟁적으로 하마평을 기사로 다뤘다.
주요 관직은 하마평에 이름이 오르내려야 자격이 있는 것으로 인식됐고, 이는 특정 직책에 적합한 인물을 발굴하는 기능도 했다. 또 주변의 평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개인의 능력과 도덕성 등을 검증하는 기능도 했다. 고위공직자에 대한 국회청문회 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언론의 하마평은 공개적으로 인사검증을 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었다.
인사권자 입장에서 하마평은 적정 후보군을 찾고, 또 이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들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순기능이 있다. 하지만 하마평에 거론되지 않은 인물을 발탁할 경우 여론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고, 또 염두에 둔 후보가 좋지 않은 평가를 받게 되면 임명을 강행하기 쉽지않다는 점에서 부담스럽기도 하다. 자의적 인사를 원할수록 언론의 하마평은 불편하고, 성가신 과정이며 소신인사의 걸림돌로 느껴지게 마련이다.
이명박 정부 때인 지난 2010년에는 정운찬 당시 총리의 사임으로 개각을 앞두고 청와대가 보도 자제를 요청하고, 출입기자단이 이를 받아들여 비난이 일기도 했다. 사전 검증의 기회를 박탈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마평 보도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은 박근혜 정부 들어서다.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부터 하마평 보도를 노골적으로 억제했기 때문이다. 정권인수위 구성을 앞두고 당사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며 인수위원 인선과 관련된 하마평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언론에 요구했다.
당시 박선규 선대위 대변인은 "박근혜 후보가 약속한 대로 인선이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기다려 달라"면서 "공식적으로 발표가 될 때가지는 상상하거나, 추측해서 미리 언론에 이름을 거명함으로서 당사자들이 곤혹스럽게 되는 일들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물론 당선자측 요구에도 불구하고 언론으로서는 독자의 관심사인 인사 관련 보도를 안 할 수 없었지만 그 양은 확실히 줄었다.
이후 당선자 측에서 발표한 인수위원 명단에는 하마평에 전혀 거론되지 않은 예상밖의 인물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최근 AIIB 부총재직을 돌연 사임하며 물의를 빚은 홍기택 전 산업은행회장, 대통령의 미국방문 때 성추행 파문을 일으키고 물러난 윤창중 전 청와대대변인 등이 포함돼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언론에서 하마평이나 인사 기사가 계속 보도되자 청와대는 이미 내정한 사람도 언론에 거론되는 순간 아예 교체해버리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이 때문에 발표일이 1~2주 지연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이러다 보니 인사대상자들은 이전과 달리 하마평에 거론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되고, 자신의 이름이 언론에 거론되면 삭제를 요청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언론은 당사자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하마평 기사를 맘 놓고 쓸 수 없게 됐다.
이제는 정부 부처와 주요 기관은 물론 청와대 개각조차도 하마평 기사를 쓰는데 조심스러워졌다.
하마평이 없어지다 보니 국가 중요 대사를 책임진 관리들을 검증할 기회가 없어졌다. 그나마 국회청문회 대상인 고위공직자는 청문회를 통해 자질과 도덕성을 검증하게 되지만 청문회 대상이 아닌 대부분의 고위공직자는 사실상 아무런 검증 장치가 없다. 청와대 인사검증이 있지만 도덕성과 관련된 부분일 뿐 자질이나 평판을 검증하는 데엔 한계가 있고, 수뢰 혐의로 구속된 진경준 전 검사장의 사례에서 드러난 것처럼 허점도 많다.
인사권자의 독단에 의한 인사는 능력과 도덕성 등의 자질보다는 정실로 흐를 소지가 클 수밖에 없다. 또한 평가 기준도 지극히 개인의 주관에 좌우돼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민중은 개·돼지'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도, 홍기택 전 산업은행회장도 만약 제대로된 하마평이 있었다면 그 자리에까지 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정부 들어 유난히 인사 문제가 많이 불거지고, 인사 난맥상에 허덕이는 것은 인사검증시스템의 문제와 함께 독단적인 인사방식에 주요한 원인이 있다. 사라진 하마평은 독단 인사의 반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