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가 죽은 후 이 완결되지 못한 자서전이 공개가 된다. 하지만 카사노바 자서전의 모든 내용이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아니다. 카사노바가 젊을 때 여자와의 염문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쓴 부분들이 인기가 있었고 유명해졌다. 그래서 편집자들은 카사노바 자서전 중에서 이 여자와의 이야기 부분만 추려내서 책을 편집했고, 바람둥이 카사노바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카사노바의 회고록은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이야드 총서에 속해 있다. 플레이야드 총서는 문학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작가들의 전집이다. 카사노바 자서전 출간 이후 많은 학자들이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허풍인지를 조사했다. 카사노바가 졸업했다는 대학, 사업 등이 정말 진짜인지 아닌지 검증을 했다. 그런데 검증될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 그리고 카사노바는 왕, 귀족, 부유층만이 아니라 창녀, 도박꾼, 노동자 등 사회 하층 사람들과도 계속 만나고 다녔다. 그래서 18세기 유럽 사회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카사노바 자서전은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카사노바 자서전에는 자기와 관계가 있었던 여자 수백 명이 나온다. 카사노바가 바람둥이인 것은 맞다. 하지만 카사노바는 단순히 바람둥이라고 하기에는 삶이 무척이나 다이내믹했다. 특히 요리 부분, 저술가 부분에서 카사노바는 유럽에 큰 기여를 한 사람으로 인정된다. 그래서 지금도 카사노바를 추종하는 카사노비스트들이 수백 명이 존재한다.
-294~295p, 「18세기의 ‘뇌섹남’, 카사노바」에서
신간 '말하지 않는 세계사'는 역사에서 웬만큼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잘 말하지 않는 이야기를 모았다.
별다른 공도 없던 맥아더가 왜 미국의 대표로 항복문서를 받았을까? 1945년 9월 2일, 도쿄만의 미주리호에서 일본 외무장관 시게미쓰 마모루는 항복 문서에 서명한다. 이때 더글라스 맥아더는 미국을 대표해서 그 자리에 섰다. 이 장면은 미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고, 그 후 맥아더는 태평양전쟁의 승리의 상징이 돼 인기와 명성을 얻었다. 미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될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은 맥아더가 아니라 해군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였다. 니미츠가 구사한 섬에서 섬으로 이동하는 아일랜드 호핑(Island Hopping)전략의 성공으로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가 가능했던 것도 미 해군의 전략에 의해 일본이 점령했던 ‘티니안 섬’을 탈환하고, 공습기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맥아더가 미군의 대표 자격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태평양 전쟁 개전 초기 맥아더는 필리핀을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호주로 도망가기까지 했다. 그 후 필리핀 탈환에만 매달렸다. 필리핀은 태평양전쟁의 주전장이 아닌데도 말이다. 저자에 의하면 정치적 쇼맨십에 능했던 맥아더가 강력히 주장해 항복문서 서명식의 주인공이 됐던 것이라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전세를 뒤집었지만 중공군의 참전가능성을 무시해 다시금 후퇴하게 되자 아예 중국 본토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확전을 불사하고자 했던 것도 맥아더 특유의 오기였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책 속으로 공식적인 프랑스혁명은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한 1789년 7월 14일부터 시작된다. 그 원인으로 프랑스의 재정 적자, 귀족의 횡포, 시민계급의 성장 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18세기 말부터 계속 이어지는 기온 하강으로 인한 흉년이 아니었다면, 특히 1788년 대흉년이 아니었다면 근대 역사를 바꾼 프랑스혁명이 일어 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농업에 의해 인류가 살아가던 근대 이전에는 날씨가 정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대 왕조의 성군과 폭군의 구별, 정치 개혁의 성공과 실패는 실제 그 당시의 기후가 좋았는지 나빴는지에 따라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21p, 「1789년 대흉년이 없었다면 프랑스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까?」에서
이때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의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된다. 이전에 우리나라가 전 세계 뉴스의 초점이 된 것은 1950년 한국전쟁 때였다. 1950년대에 우리나라는 아무것도 없는 폐허였다. 그런데 1988년 서울은 선진국은 아직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엿한 중진국은 되었다. 삼십여 년 사이에 달라진 모습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였다.
우리나라의 변화된 모습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동유럽이었다. 한국은 1950년대까지 분명히 후진국이었다. 동유럽 국가들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러던 한국이 1988년에는 동유럽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동유럽 국가들이 공산주의 경제체제에서 지낸 약 사십여 년의 세월이 잃어버린 시간이었다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더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1988년 가을,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1989년부터 동유럽 국가들은 변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때 요구한 것은 단순히 정권교체가 아니었다. 공산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로 돌아설 것을 요구했다. 그동안은 공산주의에서 잘살 수 있는지, 자본주의에서 잘살 수 있는지를 몰랐다. 영국, 프랑스, 서독 등 자본주의 국가들이 잘사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국가들은 원래 잘사는 국가였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못사는 동유럽이 잘살게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은 공산주의 시스템을 용인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더 잘살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이상 공산주의를 채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52~53p,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88 서울 올림픽」에서
그런데 청나라에서는 철도가 계속해서 만들어질 수 없었다. 청나라에서 철도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최고 권력자의 허가가 필요했다. 당시 청나라의 최고 권력자는 서태후였다. 서태후가 전국에 철도를 만들라고 해야 건설이 시작될 수 있었다. 서태후에게 철도 건설을 허락받기 위해서는 서태후가 철도를 타보고 좋다고 해야 했다. 그래서 서태후를 위한 철도가 만들어지고, 서태후를 태우고 철도가 운행된다. 이때 서태후가 탄 기차는 나귀와 환관들이 끌었다. 서태후는 기계 소리를 싫어했다. 그래서 증기기관으로 기차를 운행하지 않고 나귀와 환관들이 기차를 끌고 간 것이다. 청나라에 기술이 부족해서 철도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기술은 얼마든지 수입해서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귀와 환관들이 기차를 끌어야 하는 청나라에서는 철도가 전국적으로 부설되는 것이 불가능했다.
-66p, 「동양은 과학 기술이 부족해서 서양에게 뒤처진 것일까?」에서
『삼국지연의』의 주요 등장인물 중에서 중원 출신이 아닌 사람은 여포, 동탁, 곽사, 이각 등이다. 이들은 모두 삼국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사람으로만 나온다. (…) 단지 여포, 동탁, 이각, 곽사 등에 대해서만 이들의 잘못한 점을 물고 늘어졌다. 이민족 출신, 중국 외곽 출신들을 중국 중원 출신들은 끝까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 역사는 항상 한족 중심주의이다. 중원이 아닌 주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오랑캐이다. 한족이 아닌 사람들, 오랑캐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에서의 역사 서술은 모두 이런 한족, 중원 중심주의가 깔려 있다. 중국 역사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알려진 인물이 진짜 나쁜 인물인지, 아니면 중원 출신이 아닌 오랑캐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오랑캐는 항상 나쁜 사람이고 비난을 받는 존재이다. 아무리 공을 세웠어도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난다. 여포와 동탁은 실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73~74p, 「여포와 동탁의 억울한 사연」에서
1996년에 영국 법의학 고고학자들은 이집트 미라들을 분석했다. 미라들의 시체들에 대해 화학적 분석을 실시했는데, 몇몇 미라에서 담배 흔적이 나왔다. 머리카락과 신체 조직 등에서 담배를 피웠을 때 나타나는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또 미라에서 코카인도 검출되었다.
담배와 코카는 신대륙 발견 이후에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유라시아 대륙에 알려지고 전파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집트 미라에 담배와 코카 흔적이 있는 것일까?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집트 당시에도 이집트 등 유라시아 국가들과 남아메리카 국가들 간에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유라시아 국가와 아메리카 대륙 간 교역이 있기 위해서는 대서양을 건너야 한다. 2000년도 훨씬 전에 대서양을 건너 교역이 있었다는 것은 현재 알려진 역사로는 도무지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집트 미라들에 남아있는 담배와 코카 흔적은 공식적으로는 잘 말하지 않는 고고학적 증거가 된다.
-112p, 「인류의 역사에 어긋나는 고고학적 증거들」에서
서양이 인간 배설물 문제를 해결한 것은 수세식 화장실이 개발된 이후이다. 17세기에 영국에서 수세식 화장실이 개발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유럽 사회에 보급된 것은 한참 후이다. 그리고 인간의 배설물이 해결되었다 해도 말의 배설물까지 해결되지는 못했다. 거리는 여전히 배설물로 가득 차있었다. 1890년 미국 뉴욕에는 6만 마리의 말이 있었다. 이 말들은 하루에 1250톤의 배설물과 6만 갤런의 오줌을 길거리에 뿌렸다. 또 하루 수백 마리의 말들이 거리에 쓰러져 죽었다. 말의 배설물까지 해결된 것은 교통수단으로 자동차가 일반화된 이후이다. 자동차는 1900년대 이후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서 자동차가 점차 증가하면서 말들은 거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말이 사라지면서 말의 배설물들도 거리에서 사라졌다. 서양 거리에서 배설물이 없어지게 된 것은 이제 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 자동차는 매연을 발생시켜 환경에 큰 피해를 주는 존재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자동차는 거리의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켜주는 친환경 기기였다. 결과적으로 거리에서 배설물을 제거하고 깨끗한 거리를 만든 것은 자동차였다.
-128~129p, 「배설물의 사회사_화장실, 퇴비, 그리고 자동차」에서
현대전 이전 전쟁의 특징이 하나 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쟁에서 전투로 인해 사망하고 부상을 입은 것이 아니다. 전쟁에서 병이 나서 사망했다. 병으로 사망한 병사들이 적과의 전투로 사망한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 사실 전쟁에서 승패를 가르는 요인은 병사들이 얼마나 더 열심히 잘 싸우느냐가 아니었다. 병에 걸려서 죽는 병사가 얼마나 되느냐가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었다.
과거 전쟁에 대한 기록에서 전투로 사망한 병사와 질병으로 사망한 병사 수를 제대로 구분해서 기록한 것은 많지 않다. 그래서 전쟁 사망자 중에서 적과의 전투로 사망한 사람과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비율을 정확히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전투로 인한 사망과 질병으로 인한 사망을 구분해서 기록한 몇몇 전쟁 자료들을 보면 전투로 인한 사망자보다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매번 더 많은 것으로 나온다.
-128~129p, 「전쟁에서 적군보다 무서운 것은…」에서
백인 노예상들은 이 지역에서 아프리카 흑인들을 납치하러 다닌 것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추장들에게 돈을 주고 샀다. 흑인 노예들은 그래서 별 반항 없이 아메리카로 가는 배에 올랐고, 아메리카 노예 시장에 나왔다. 자기는 노예라고, 반항하고 대들지 않았다. 자기는 원래 노예였고,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다른 주인을 만나게 되는 것일 뿐이다.
-155p, 「아메리카 노예는 아프리카 노예였다」에서
맥아더는 일본군을 무찌른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본군은 맥아더의 육군으로부터는 피해를 받은 것이 없다. 일본군을 항복하게 한 것은 미 해군이었고, 미 해군의 지휘자는 체스터 니미츠였다. 맥아더가 영웅으로 올라선 것은 육군과 해군 중에서 육군을 더 우선시하는 군대 내의 전통, 그리고 맥아더의 정치적 성향 때문이었다.
-183p, 「맥아더가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까?」에서
현재 프랑스의 과거 청산은 너무 심했다는 평가도 많다. 정말로 독일 편을 들었던 사람을 숙청한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숙청을 당했다. 제대로 된 재판 없이 당시 레지스탕스들의 독자적인 판단만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때 숙청당해 죽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는 현재까지 제대로 추정이 안 된다. 사망한 사람의 수는 1만 명에서 10만 명까지 추정된다. 제대로 절차를 거쳐 시행된 처형이 아니라 프랑스 각지에서 마음대로 이루어진 처형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프랑스 여성들에 대한 보복을 잘 말하지 않는다. 아무리 독일군을 만난 것이라 해도, 젊은 여자가 남자들을 만났다는 이유로 처벌을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특히 젊은 여자들을 공개적으로 삭발을 시키고 나체로 거리를 끌고 다닌 것은 처벌이 아니라 광기였다. 독일에 대해 협력했다는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여자들에 대한 복수였다. 프랑스 남자들은 전투를 하고 레지스탕스가 되는 등 어렵게 전쟁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많은 여자들은 독일 남자를 만나 데이트를 하고 잘 지냈던 것에 대한 보복이었을 뿐이다.
-252~253p, 「프랑스의 과거 청산이 남긴 빛과 그림자」에서
원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사람들에게 다방면의 천재로 인정받았던 것은 아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는 다빈치가 죽은 지 300년 정도가 지나서 출간되었다. 이 노트에는 정말로 헬리콥터, 낙하산, 인체도 등이 그려져 있었고, 다방면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실들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시대를 앞서간 다방면의 천재로 알려졌다.
19세기 이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는 정식으로 연구되기 시작한다. 이 노트 연구에서 알게 된 것은, 다빈치의 노트가 다빈치가 스스로 발견한 것을 기록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빈치가 혼자 생각하고 사색해서 발견한 것을 적은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자기가 좋았던 것, 감명 깊은 것들을 옮겨 적은 것이었다. 즉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는 창조 노트가 아니라 학습 노트였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적는 노트와 같은 것이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다방면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랬기에 다방면에 대한 스케치와 글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다방면의 혁신가, 아이디어맨이자 창조자였다고 볼 수는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단지 자기가 본 책들을 잘 정리한 노트를 만들었을 뿐이다.
-284p,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정말 다방면의 천재일까?」에서
생물들을 채집하던 1858년 2월, 당시 월리스는 테르나테 섬에 있었다. 병에 걸려 고생하는 와중에 생물들이 서로 다른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소위 적자생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생물은 변화하고, 이 변화에 적응한 생물이 살아남게 된다- 개념이 떠오른다. 월리스는 이 생각을 논문으로 쓴다. 보통 학자들은 이렇게 논문을 쓰면 학회에 보낸다. 학회는 그 논문을 평가해서 학회지에 싣는다. 하지만 월리스는 그 논문을 학회에 보내지 않고 다윈에게 보낸다. 당시 다윈은 영국에서 유명한 생물학자였다. 이에 반해 월리스는 학문의 세계에서는 초보자이고 아마추어였다. 자신의 생각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어떻게 평가될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다윈에게 먼저 원고를 보낸다. 그 원고는 3월 9일 테르나테 섬을 출발했다.
(…) 1858년 7월 1일 린네 학회에서는 먼저 다윈의 논문이 발표되고 그 다음에 월리스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다윈의 논문이 먼저 발표된 것은 다윈이 먼저 이 진화론 개념을 생각했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해서 진화론을 처음 생각한 사람은 다윈으로 알려진다.
(…) 진화론을 발견한 것은 다윈인가 월리스인가. 월리스의 편지봉투가 사라진 현재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학계의 원칙에서 볼 때는 논문을 먼저 쓴 월리스가 우선권이 있는 것이 맞다. 다른 사람의 논문을 받고 읽은 후에 자기도 발표하기로 했다는 것은 최소한 학계에서는 인정될 수 없는 이야기이다
-298~303p, 「다윈보다 먼저 진화론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