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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의 빛, 그 찬란한 고독의 순간"



책/학술

    "호퍼의 빛, 그 찬란한 고독의 순간"

    신간 '빈방의 빛:시인이 말하는 호퍼'

     

    '빈방의 빛: 시인이 말하는 호퍼'는 시인 마크 스트랜드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30점에 대해 쓴 글이다. 때론 에세이처럼 때론 미학 비평처럼 써내려간 이 글들은 모두 시인의 글이라는 점에서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호퍼의 그림은 사회상의 기록도, 불행에 대한 은유도 아니다. 또한 미국인의 심리적 기질 같은 어떤 조건들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부정확하기는 마찬가지다. 호퍼의 그림은 현실이 드러내는 모습을 넘어서는 것으로, 어떤 '감각'이 지배하는 가상 공간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이 책의 주제는 바로 그 공간을 읽어내는 것이다." _ 13~14쪽

    미국의 현대미술 작가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작가를 꼽으라면 많은 이가 주저 없이 호퍼를 꼽는다. 특히 그의 그림 「나이트호크」는 현대 미국인의 일상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한 그림으로 이해되었고, 그런 이유로 광고나 영화 같은 많은 대중문화 양식이 '호퍼 스타일'을 차용했다. 호퍼 스타일은 팝아트처럼 일상적인 오브제가 뿜어내는 기이한 거리감과 고독감 그리고 독특한 빛 표현에서 비롯되는데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호퍼 스타일의 활용 예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최근 인기몰이를 한 인터넷 쇼핑몰의 TV 광고가 대표적이다.

    특별한 소재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일상의 한 장면을 멈춰 세운 듯한 호퍼 스타일에 왜 우리는 빠져드는 걸까? 이에 대한 대답은 대부분 "그의 그림은 20세기 초 미국인의 삶의 변화에서 온 만족감과 불안감을 보여준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빈방의 빛'의 작가 스트랜드는 이런 평가에 불만을 표한다. 이런 설명만으로는 왜 그토록 다양한 "관객이 그토록 강렬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스트랜드가 보기에 호퍼는 일상을 그려냄으로써 일상의 이면을 끄집어낸 화가다. 그 이면을 마주해 관객이 느끼는 건 고독이라기보다는 낯섦이다. 호퍼를 '사실주의 화가'라 부른다면 이때 '사실'은 낯선 "가상 공간"에 자리한다. '평이한 일상'이라는 주제가 우리를 그림 속으로 끌어들이지만, 보면 볼수록 낯설어 결국에는 완전히 생경한 공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심란할 정도로 조용하고, 방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끝내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다." _ 113쪽

    호퍼의 그림이 지니는 이러한 역설적인 측면, 함께 있으면서도 등을 돌리고 있는, 누군가를 기다리면서도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즉 "떠남과 머무름의 역설"이라는 자못 시적인 매력을 스트랜드는 읽어낸다. 이것이 바로 어느 미술비평가도 찾아내지 못한, 그가 시인이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호퍼 스타일의 숨은 매력이다.

    떠남과 머무름의 역설은 그림의 기하학적 구성과 서사적 장치의 상호작용으로 더욱 강렬해진다. 예를 들어 호퍼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다리꼴 구성은 소실점을 캔버스 밖에 머물게 함으로써 미지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창문의 열린 틈에 칠해진 아주 어두운 색은 알 수 없는 깊이감을 만든다. 이 '알 수 없는 장치'들에 시선이 부딪히는 순간 관객들은 낯익은 풍경이 갑자기 낯선 풍경으로 변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호퍼의 빛 처리는 이러한 효과에 힘을 더한다. 그가 그린 빛은 "이상하게도 공기를 채우고 있는 것 같지" 않고 "벽이나 물건에 달라붙어 있는 듯하다." 이 달라붙는 강도가 상당해서 어느 물체(형태)에 빛이 드리워진 게 아니라 빛이 곧 물체(형태)를 가장하며 양감(量感)을 뿜어내는 듯하다. 모네의 빛이 사방으로 부서지고 흐른다면 호퍼의 빛은 단단하고 정지되어 있다. 빛의 정지는 궁극의 정지다. 호퍼의 그림이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단절된 "가상 세계"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빛의 이러한 성격은 호퍼가 그린 공간의 성격 때문에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기억에 의존해 그림을 그렸는데 당연히 기억에 남지 않은 것들은 축소하거나 삭제했다. 텅 빈 공간에 남은 것이라곤 과감하게 존재감을 드러낸 빛뿐이다.

    "1963년에 그려진 호퍼의 마지막 걸작인 이 그림은 우리가 없는 세상의 모습이다. 단순히 우리를 제외한 공간이 아닌, 우리를 비워낸 공간이다. 세피아색 벽에 떨어진 바랜 노란빛은 그 순간성의 마지막 장면을 상연하는 듯하니, 그만의 완벽한 서사도 이제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_ 103쪽

    스트랜드는 평이하고 절제된 언어가 빚어내는 기이한 초현실적 이미지의 시를 쓰는 작가다. 그래서 그의 시는 종종 호퍼의 그림과 비교된다. 오랫동안 스트랜드의 시를 읽어온 옮긴이 박상미는 『빈방의 빛』이 스트랜드라는 시인의 특별한 시각을 담은 책이라는 점을 유념하며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는 그의 시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으며, 그 모습은 어쩔 수 없이 호퍼를 닮았다고 말이다.

    스트랜드는 이 책에서 시인의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그림의 분위기뿐 아니라 형식적인 측면 그리고 그림의 초월적인 깊이까지도 섬세하게 압축해낸다. 그가 호퍼의 공간을 시간적인 은유로 표현한 다음과 같은 대목은 호퍼의 작품을 이해하는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다.

    "호퍼의 그림은 짧고 고립된 순간의 표현이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볼 때 그림이 드러내는 연속성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호퍼의 그림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사건들로 채워질 장소로서의 빈 공간이 아니다. 즉 실제의 삶을 그린 것이 아닌, 삶의 전과 후의 시간을 그린 빈 공간이다. 그 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그 어두움은 우리가 그림을 보며 생각해낸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요점을 벗어나 있다고 말해준다." _ 114~115쪽

    스트랜드의 이와 같은 지적은 지금까지 우리가 호퍼를 감상해온 방식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요점을 벗어나"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스트랜드식으로 호퍼를 읽어봄으로써 호퍼의 그림을 감상하는 다른 차원을 경험할 뿐 아니라 예술을 보는 전반적인 시각까지 변하게 됨을 느끼게 된다.

    "그림을 볼 때 필요한 건 미술사적인 지식과 비평적 관찰뿐만이 아니다. 스트랜드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나’라는 개인의 고유한 시각, 명철한 시정(詩情)으로 예술에 접근하는 태도를 배우게 된다." _ 115쪽

    결국 이 책은 그 끝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독자를 호퍼의 그림 앞에 앉힌다. 이번에는 각자의 ‘스타일’대로 호퍼 스타일과 마주해보라는 요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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