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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작렬] "차관보님 앉으시게 자리 좀 빼주세요"

기자수첩

    [뒤끝작렬] "차관보님 앉으시게 자리 좀 빼주세요"

    윗선 눈치만 보는 영혼없는 공무원 사회…저항하면 정권의 철퇴

    노컷뉴스의 '뒤끝작렬'은 CBS 노컷뉴스 기자들의 취재 뒷얘기를 가감 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전 방위적 사회감시와 성역 없는 취재보도라는 '노컷뉴스'의 이름에 걸맞은 기사입니다. 때로는 방송에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따스한 감동이 '작렬'하는 기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수능일인 17일 오전. 팀원들과 함께 서울 정부종합청사 인근 커피숍을 찾았다. 주문을 마치고 운좋게 쇼파로 된 편한 자리에 앉은지 얼마되지 않아 옆자리 손님이 말을 걸어왔다.

    "혹시 언제까지 계실건가요?"라는 뜬금없는 질문에 "저희도 방금 자리에 앉았습니다"라고 정중히 답했지만 "10시까지는 일어날 건가요?"라며 그 손님의 집요한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짜증이 나기 시작해 "왜 그러시냐?"라고 물어보자 "저희 차관보님께서 10시에 오실건데 자리를 만들어야 해서 그런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상관이 온다고 다짜고짜 자리를 내놓으라는 식의 무례한 행동을 하는 이 공무원은 정부부처 중에서 힘깨나 쓴다는 모 부처 공무원이라고 자신의 소속을 밝혔다.

    정부 고위관료는 다른 일반 시민들처럼 자리가 나기를 기다릴 시간이 없나? 아니면 쇼파가 아닌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서는 커피를 마실 수 없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핀잔을 줬더니 이 공무원은 머쓱했던지 곧 자리를 떴다. 실랑이가 오가는 사이에는 화도 났지만 결국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측은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얼핏봐도 40대 중반 이상으로 보이는 이 공무원은 차관보를 보좌하는 나름 부처 내의 핵심 인력 중에 한명일 터, 여기다 해당 부처의 위상을 생각하면 공무원 사회에서의 위세 또한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서울로 출장 온 차관보를 보필할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를 무릅쓰고라도 윗사람이 오시기 30분 전에 편한 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심부름꾼' 수준으로 전락한 셈이다.

    ◇ 비선실세에 드리워진 공무원들의 그림자

     

    문민정부 수립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사건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윗사람 눈치만 보는 영혼없는 공무원 사회도 한몫 단단히 했다.

    전두환 정권 당시 일해재단과 비견되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이 탄생하기까지 문체부 공무원들은 김종 전 차관의 진두지휘 하에 윗선의 지시를 철저히 이행했다.

    최순실의 조카 장시호가 만든 체육단체에 특혜성 예산이 지원되는 데도 문체부 공무원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승마선수인 그의 딸 정유라가 각종 특혜를 받는 과정에는 교육공무원과 경찰공무원, 세무공무원 등이 등장한다.

    또 각 부처 예산 삭감에 혈안이 된 기재부 공무원들 역시 수천억원대에 이르는 최순실의 측근 차은택 관련 문화예산을 깎기는 커녕 퍼주는 데 혈안이 됐다.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 조직이라는 검찰 역시 생존의 이유인 '거악척결'은 고사하고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진두지휘 아래 이들을 방조, 더 나아가 비호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들 공무원의 공통점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윗선의 지시에 따라 공무원의 직업적 양심에 위배되는 결정을 내렸다는 데 있다.

    ◇ 공무원 사회 장악한 정권에 힘 못쓰는 공무원들

    흔히 공무원 사회를 '복지부동'이라고 비판하지만 인사에 있어서 만큼은 예외다. 특히 고위직에 다가갈수록 경쟁자들을 제치고 한정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발에 땀이 나도록 움직인다.

    윗선, 특히 청와대와 줄이 닿을 경우 승승장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설사 잘 안풀려 옷을 벗더라도 이왕이면 고위직일수록 각종 산하기관이나 관련 단체에 갈 확률이 높다.

    이 때문에 장ᆞ차관 등 고위 공무원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일렬로 줄을 서 청와대부터 시작되는 윗선의 지시를 영혼없이 이행하는 데 여념이 없다. 때로는 알아서 기는 것이 능력으로 통하기도 한다.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며 오랫동안 공무원 사회를 지켜본 박근혜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 이같은 공무원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정권 출범 이후 오랜기간 가장 주력한 일이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부처 안팎에서 전 정권 사람을 몰아내고 내사람을 심는 일이었다.

    그 결과 취임 첫해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불통인사와 세월호 참사, 그리고 정윤회 문건 유출 등 각종 대형 악재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사회를 주무를 수 있었다.

    특히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우병우 민정수석을 앞세운 검찰 길들이기는 혀를 내두를 수준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다. 공무원 사회가 국민이 아닌 청와대를 정점으로 하는 윗선에 충성하는 사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며 온 나라를 혼돈에 빠뜨렸다.

    만약 문체부를 비롯한 공무원 사회가 기본적인 상식을 가졌더라면, 이해하기 힘든 비선실세에 대한 특혜를 묵과하지 않고 반대 목소리를 내는 등 저항했다면 어땠을까?

    답은 간단하다. 하루아침에 장관직에서 경질된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처럼 되는 것은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다. 정윤회 문건을 폭로했다가 감옥에 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경찰관들의 신세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아침에 만난 공무원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차관보님이 오시는데 커피숍에 명당자리 하나 맡지 못한 무능력한 공무원으로 찍히지나 않았을지… 자리를 양보해줄걸 그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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