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워싱턴에 온 평화의 소녀상이 영구적으로 발을 땅에 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10일(현지시간) 오후 2시, 영하의 기온을 넘나든 워싱턴DC의 내셔널 몰. 한국에서 온 한 할머니의 차분한 음성이 차가운 바람을 뚫고 울려 퍼졌다.
1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내셔널 몰 안 야외공연장인 실번 시어터에서 열린 워싱턴 평화의 소녀상 환영식에서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89) 할머니가 연설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13살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가 5년 동안 성노예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던 길원옥(89) 할머니.
길 할머니는 이날 내셔널 몰 안 야외공연장인 실번 시어터에서 열린 워싱턴 평화의 소녀상 환영식에서 연설했다.
가로 200㎝, 세로 160㎝, 높이 123㎝로, 서울 소공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과 동일한 크기의 '워싱턴 소녀상'은 한국에서 제작돼 지난달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러나 소녀상은 아직 영원히 발을 디딜 안식처를 찾지 못했다. 도착한 지 한 달을 넘어서고 있지만 '제막식'이 아닌 '환영식'을 갖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소녀상은 임시 제막식을 겸한 환영식이 열린 2시간 동안만 모습을 드러낸 뒤, 곧바로 인근 버지니아 주의 한 창고로 옮겨져 보관된다.
워싱턴 소녀상 건립 추진위는 소녀상의 영구 설치 장소를 찾기 위해 대학, 교회 등 워싱턴 내 주요기관들과 접촉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만족할만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조현숙 추진위 공동위원장은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분들이 있어, 선뜻 건립하겠다고 나오는 곳이 없다"며 "내년 봄까지는 설치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워싱턴 평화의 소녀상과 휠체어에 앉은 길원옥 할머니
우리 정부에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철거를 요구했던 일본이 해외에서 추진되는 소녀상 건립을 적극적으로 차단하고 나서는 것과도 무관치 않은 듯했다.
조 위원장은 "몇 달 전 독일에서도 일본의 반발로 평화의 소녀상 건립이 무산된 바 있다"며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9월 독일 프라이부르크 디터 잘로만 시장은 소녀상 건립 계획 철회를 발표하면서 "시장직을 수행한 모든 기간보다 더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날 워싱턴 소녀상 환영 행사에서는 아사히TV 등 일본 언론들도 적극적으로 취재하는 모습이었다.
길 할머니는 "소녀상이 전쟁을 모르는 미래 세대에게 평화와 인권교육의 교과서가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며 전쟁에서 희생당한 여성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다음에 또 오고 싶지만 이렇게 꼬부랑 할머니가 다 돼서 다시 오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고 저는 서울로 돌아가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평화를 위해 열심히 살겠습니다"고 다짐했다.
추진위의 양현승 공동위원장은 축사에서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서 워싱턴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을 거행해 역사를 제대로 보고 바르게 하는 위대한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며 "참석해준 미국 시민께 경의를 표하며, 함께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싸워나가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