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배청구 1600억원, 가압류 175억원.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행사한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기업과 국가가 청구한 손해배상액이다. CBS노컷뉴스는 손배가압류의 탈을 쓴 '新노동탄압'의 피해를 막기 위해 3차례에 걸쳐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봤다.[편집자 주]
가벼운 눈발이 내리던 지난 12일, 정부서울청사 앞에 세워진 비닐 천막 한켠을 들추고 들어가자 10여명의 사람들이 이불을 펼치고 서로의 체온으로 한겨울 추위를 버티고 있었다.
이 곳에서 만난 하이디스노조 이상목 지회장은 '기술 먹튀' 논란 속에 '제2의 쌍용차 사태'로 불리는 하이디스 대량해고에 반대하며 2년째 노숙 농성을 벌이고 있다.
◇ '신발' 던져서 1억, '열사' 주장해서 4억… '툭' 치고 '억' 받아가는 손배소이들이 일하던 초박막 액정표시장치(TFT-LCD) 제조업체인 하이디스테크놀로지는 2008년 대만에 인수됐는데, 대만 경영진이 생산 손실을 이유로 공장을 폐쇄하고 330여명을 정리해고 대상으로 올렸다.
퇴직을 거부하던 80여명은 해고됐고, 사측은 해고에 반발하는 노조를 상대로 업무방해 명목으로 무려 21억여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지회장에게 제기된 나머지 2건의 손배청구액이다. 사측은 그동안 노사쟁의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던 모욕과 명예훼손 혐의로 각각 1억원과 4억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사측이 "모욕감을 느꼈다"며 노조에 1억원을 요구한 이유는 집회에서 흔히 있는 한 퍼포먼스 때문이다. 경영진을 찾아간 대만 원정투쟁에서 경영진 사진을 세우고 신발을 맞추는 퍼포먼스를 한 일이 억대의 손배소로 번져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회사가 열사를 만들었다'고 울분을 토한 일도 손배소 대상이 되기도 한다. 2015년 5월 사측과 갈등이 첨예하던 가운데 배재형 전 지회장이 숨진 채 발견된 일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노조가 사측의 손배소 위협으로 고인이 괴로워하다 숨졌다고 주장했고, 이 발언이 기사화되자 사측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이라며 고소했다.
설날 연휴 이틀 전인 오는 24일에 손배소 1심 선고를 앞둔 이 지회장은 "심지어 사측이 제 아내 명의의 전세자금도 가압류를 청구하기도 했다"며 "불법 가압류로 효력이 없더라도, 법원에서 전세금을 압류한다는 우편물을 받아들었을 때의 압박감과 가족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 노동부도 법원도 인정한 실체 없는 유령회사… 손배소 진행은 그대로?정규직과 같은 대우를 요구하던 동양시멘트 노조 비정규직 조합원 23명에게도 50여억원의 손배가 걸려있다. 게다가 가압류 6억 원은 이미 집행돼 조합원 평균 1500여만 원의 재산이 압류된 상태다.
하지만 정작 손배를 제기한 인력회사는 노동부와 법원 모두 페이퍼컴퍼니로 인정한 상태인데도, 유령 회사가 원고인 손배소와 가압류는 그대로 '현재진행형'이다.
2015년 노동부 태백지청은 동양시멘트 하청노동자들이 소속된 인력업체 동일·두성 두 회사가 형식상 세워진 페이퍼컴퍼니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사측은 10억여원의 이행강제금을 납부한 채 101명의 하청노동자를 해고했다.
이후 강원지방노동위와 중노위가 위장도급을 인정하고 부당해고라고 판정했고, 서울중앙지법은 "파견관계가 인정된다"며 동양시멘트가 고용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사측은 2016년 3월 노조와 간부를 상대로 제기한 50억대의 손배소를 그대로 진행하고 있고, 사측의 압박 속에 노조원은 반토막이 났다.
동양시멘트 노조 안영철 사무국장은 "업무방해로 지회장이 구속되자마자 손배가압류가 들어와 대응도 못했다"며 "노조만 탈퇴하면 가압류에서 풀어주니 조합원들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은행은 물론이고 전세자금에 임대차, 월세자금까지 죄다 가압류가 들어오는 형편"이라며 "통장 가압류로 생활비 5만원도 인출하지 못해 주변에 돈을 빌려 연명하는 모습을 보면 노조원은 죽으라는 것인가 싶다"고 하소연했다.
◇ 가난한 죄로 가압류 받는 노동자들… "손배소 문턱 높이고 법원 태도 바꿔야"그동안 노사 간의 갈등에서 벌어지는 손배소공방은 파업이나 공장폐쇄 등 노사 분쟁의 결과로 일어난 폭력, 재물손괴, 영업방해 등에 대한 손배소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최근에는 하이디스나 동양시멘트 사례처럼 세간의 상식에 벗어난 '황당' 손배소까지 벌어지고 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손배소가 횡행하는 이유는 비교적 자금이 풍부한 사측은 손배소를 제기해도 큰 부담이 없는 반면, 노조와 조합원들에게는 소송을 제기하고 가압류를 거는 것만으로도 강한 경제적 압박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안 사무국장은 "돈이 있는 회사는 공탁금만 걸고 손쉽게 가압류를 걸기 때문에 노조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며 "유령업체로 판명났는데도 손배가압류는 그대로 진행되니 노사 문제를 민사로 해결하라는 노동부와 법원은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현행 손해배상소송의 구조 자체에도 사회적 약자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여지가 많다. 똑같이 노사쟁의에 대한 손배소를 진행해도 노조는 밀린 임금만 돌려받지만, 사측은 예상 매출까지 모두 피해액으로 산정된다.
또 노동자들과 달리 사측은 충분한 자산이 있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없다는 이유로 압류를 피할
수도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가압류를 받고, 언제든 배상할 수 있을만큼 부유하기 때문에 압류를 면한다는 얘기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는 "현재 법원은 노사 갈등의 잘잘못과 내부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피해 여부만 따져서 기계적으로 손배소를 처리하고 있다"며 "기업들의 손배청구 남용을 막을 법적 제동장치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 시민모임 손잡고(02-725-4777)는 노동3권에 보장된 쟁의행위에 대해서는 손배가압류를 할 수 없도록 막기위해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일부개정안)을 마련했습니다. '노란봉투법'은 시민들의 모금으로 만든 법안으로, 손잡고는 20대 국회에 '노란봉투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입법청원(https://goo.gl/forms/53SceP1Ts8HrgfXt2)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