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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 평론집 '일본 이데올로기'

책/학술

    다케우치 요시미 평론집 '일본 이데올로기'

    '사상에 이르지 못한 일본 이데올로기'에 맞선 지적 투쟁의 기록

     

    <일본 이데올로기="">는 루쉰 연구 1세대로도 저명한 중국문학자 다케우치 요시미의 평론가로서의 면모를 깊고도 짙게 음미할 수 있는 있다. 그의 평론들은 당면한 현실 문제에 대한 처방전을 내려 하기보다는 현실을 안고 가는 역사의 유동성에 대한 고도의 감수성을 담고 있다.

    마치 루쉰이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그러했던 것처럼, 다케우치 요시미는 당대 일본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신랄한 촌철살인을 마다않는 비평가였다. 또 제대로 된 미래를 건설하는 데 작용하기 위해서라면 치열하게 가설을 세우고 부수기를 주저하지 않는 평론가였다. 과거에 유용했던 가치라 해서 곧바로 도그마로 삼지도 않았고, 틀린 것으로 판명 난 이론이라 해도 존재를 지우는 대신 더 나은 다음 가설을 위한 요소로 삼았다. “어설프게 이기느니 잘 지는 것이 낫다”는 자신의 말대로 그가 내놓았던 전망들은 시간과 사건에 노출되어 때로는 깨져 나갔지만 그렇게 다듬어지면서 특유의 역사성을 띠게 된다.

    다케우치가 평론가로서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1950년대부터 1960년을 전후로 한 안보투쟁기였다. 그는 이 시기를 일본 국가의 진정한 자주와 독립을 실현할 수 있는 동시에 안으로는 민주의 회복(노예구조로부터의 탈각)이라는 사상사적 의의를 갖출 기회라 보았기에 상황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논평하는 글을 썼다. 당시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현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정권으로 상징되던 일본인 일상감각 깊숙한 곳의 노예근성을 향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의 글 곳곳에는 자신이 속한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그 비판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자신의 사회와 함께 무너지겠다는 절박함이 배어 있다.

    현실이라는 진흙탕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지기보다는 두려움 없이 그 속에서 함께 구르고 싸웠던 다케우치는 그런 점에서 니체적이라기보다 루쉰적이라고 할 만한 지식인이었다. 안보투쟁이 사실상 실패하고 일본 사회가 본격적인 고도성장경제 노선으로 접어들던 무렵인 1965년, 그는 평론가 폐업을 선언한다. 현실 속에서의 되먹여짐 없이는 자신의 논평 활동이 의미를 잃었다고 판단한 자기봉인인 셈이었다. 즉 이 책에 실린 글들은 1950년대부터 20여 년간, 다케우치 요시미가 품었던 일본 사회에 대한 치열한 애정이 가장 빛나고 살아 움직이던 시절의 자취다. 좌절의 기록이었다고까지 할 만한 그 사상 역정의 가장 뜨거운 글들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진보주의자들은 진보를 믿는다. 그러나 그 진보란 관념이지 유럽의 진보가 아니며 루쉰이 말하는 ‘인류의 진보’도 아니다. 루쉰의 진보는 절망을 매개로 하지만, 일본의 진보는 그림자가 없는 관념이다. (중략) 진보주의는 일본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지 싶은데, 그것은 부정의 계기를 머금지 않은 진보주의, 즉 노예적 일본 문화의 구조에 올라타고는 안심하는 진보주의다.”

    1952년의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 이데올로기="">의 서문에서 내재하는 일본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각을 기도하고자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고 밝힌다. 그가 갈구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사상’이었다. 그가 말하는 사상이란 ‘생활로부터 나와, 생활을 넘어선 곳에서 독립성을 유지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일본에 아직 싹트지 않은 사상만이, 혹은 아직 생활에 매개되지 않은 따옴표 친(외래의) 사상만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과연 노예구조의 지배로부터도 독립해야 할 새 일본의 진정한 사상이란 어떤 형태와 방법으로 가능한지 고민했다.

    1950년대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한국전쟁 등 커다란 사건을 겪어 나가며 다케우치 요시미가 줄곧 ‘이데올로기’를 문제로 삼았던 것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상을 만들어 내는, 즉 이데올로기 형성과 관계하는 지식인의 주체성을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지적 권위의 대상을 중화에서 유럽으로 옮겨 놓았을 뿐인 일본 지식인의 ‘기식성’, ‘식민지성’, ‘노예성’ 극복이 그에게는 일본 인텔리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문제였고 사명이었다.
    그리하여 다케우치는 전후 일본의 인텔리들, 또 당시 그중 많은 수를 흡수했던 ‘지식인 그룹’으로서의 공산당을 대상으로 가차 없는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정신적 태도의 힘과 문장의 글맛 또한 이러한 가운데서 뿜어져 나온다.

    다케우치가 공산당을 비판한 이유는 「일본공산당 비판 1」의 첫 문장 “일본공산당에 대한 나의 불만을 파고들면 결국 일본공산당이 일본의 혁명을 주제로 삼지 않는다는 데 이르지 않을까 생각한다”라는 말에서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소련·중국 공산당이 가진 권위에의 맹종을 두고 나온 이 언설은 결국 반권위주의이자 근대주의 비판이기도 했다. 쑨원이 정의한 ‘근대주의’에 따라 그는 자주적으로 자기 사회를 해부하고 개혁하려는 의지가 감퇴해 결과적으로 주체성을 상실하고 개혁의 악순환에 빠지고 마는 일본 인텔리의 상황에 절대로 눈감지 않았다.

    “차리즘과 천황제의 전통, 이 전통을 파괴하는 힘을 내부로부터 만들어 내는 것, 뒤집어 말하자면 이단을 배제하지 않는 적극적 정통성을 만들어 내기를 나는 일본의 공산주의자에게 바란다. 그게 가능하지 않다면 일공은 영영 소수당에 머무를 것이다. (중략) 공산당이 합법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원내 활동은 차치하고, 진지하고 선의를 가진 민중의 터전으로서도 집결소로서도 공산당은 없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정도로 괜찮은지가 문제다. 합법성을 정치적 무력함과 맞바꿔도 좋은가. 나는 일본공산당의 창립 40주년을 축하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남몰래 건배라도 하고 싶을 정도다. 다만 한편에서는 ‘40년 따위 똥이나 처먹어라’ 하는 공산주의자도 있었으면 좋겠다. 역사는 끊임없이 현재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동향에는 민감하나 생활세계로부터의 요구에는 둔감하며 스스로 고심해 만들어 내기보다 만들어진 것을 들여오는 지름길만을 찾는, 근대적 인텔리의 생성을 둘러싼 문제는 한국을 포함한 수많은 지역과 국가사회에서 어느 시기엔가는 겪게 되는 공통의 현상일지 모른다. 아시아 내부의 ‘냉전’을 통한 각축 상황의 극복, 공통된 희망이어야 할 ‘평화에의 지향’, 다케우치 요시미의 작업은 그것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가 던진 물음은 지금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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