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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소설집 '빛의 호위'



책/학술

    조해진 소설집 '빛의 호위'

    에쿠니 가오리 장편소설 '벌거숭이들' 신간 소설 2권

     

    작가 조해진의 세번째 소설집 '빛의 호위'가 출간되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이효석문학상 수상작 '산책자의 행복'을 비롯한 9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특히 이번 소설집에서는 조해진이 오랫동안 천착해왔을 뿐 아니라 세월호시대를 살아가며 더욱 견결해진 주제인 “역사적 폭력이 개인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한기욱, 해설) 하는 지점을 한층 섬세하고 차분하게 파고든 점이 돋보인다. 작가는 절망과 고독을 감싸주는 기억들을 이야기하며, “사라졌으므로 부재하지만 기억하기에 현존하”(「사물과의 작별」 69면)기 때문에 “생존자는 희생자를 기억해야 한다”(「빛의 호위」 16면)는 절실함으로 단어 하나에도 진심을 담아 눌러 썼다. 조해진이 보듬어 전달하는 ‘빛의 호위’로,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기억해야 하지만 어둠속에 숨어 있던 진실들에도 따뜻한 온기가 전해질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장롱 뒤나 책상 서랍 속, 아니면 빈 병 속처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얄팍하게 접혀 있던 빛 무더기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일제히 퍼져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짧은 순간에 대해서라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른 세계를 잠시 다녀오는 것 같은 그 황홀함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권은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악기상점의 쇼윈도우에 반사되는 햇빛이 오직 그녀만을 비추고 있었다.(「빛의 호위」 32면)

    실제로 유실물에는 저마다 흔적이 있고, 그 흔적은 어떤 이야기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나를 유혹할 때가 많다. (…) 엄밀히 말하면 그 이야기는 유실물을 사용한 누군가의 손때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누군가를 잃어버린 유실물은 선반의 고정된 자리에서 과거의 왕국을 홀로 지켜가는 것이다. 간혹 유실물에서 빛이 날 때가 있다. 일년 육개월이라는 보관기간을 채우고도 찾아오는 이가 없어 처리되기 직전, 홀연히 나타났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빛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한 개인에게 귀속되지 못하고 망각 속으로 침몰해야 하는 유실물이 세상에 보내오는 마지막 조난신호를 본 것 같은 상념에 빠져들곤 했다. 일종의 상실감이었다.(「사물과의 작별」 69면)

    또하나 주목할 점은 이번 소설집에서 조해진이 말하는 ‘살아 있음’에 대한 감각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를 살게 하기 위해 고투하면서 그 힘으로 살아가는데, 그 상대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기도 하지만 상관없는 이국의 누군가가 되기도 한다. 세상을 떠난 언니가 동생을 살아가게도 하며(「잘 가, 언니」), 어린 시절 친구에게 선물한 카메라가 그를 세상 밖으로 이끌기도 하고(「빛의 호위」), 신문에 실린 사진 한장이 “먼 나라의 화가에게 작품을 완성하도록 부추기는 영감을 주”(「시간의 거절」 181면)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를 살리는 절실함은 「산책자의 행복」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철학과 강사였지만 학과 통폐합으로 직장을 잃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는 홍미영(라오슈)에게 답장이 없는 편지를 계속 보내는 중국인 제자 메이린은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127면)라는 라오슈의 말을 되새기며 살아가고 라오슈는 현실에 괴로워하면서 마음속으로만 답장을 보내지만, 둘 사이의 믿음은 분명 서로를 살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살고 싶어.
    목적 없이 뻗어 있는 길 한가운데서 그녀는 속삭였다. 미치도록……
    미치도록 살고 싶어.
    메이린, 부르며 그녀는 흐느꼈다.
    (…)
    저는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고,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다예요, 라오슈……(「산책자의 행복」 140~142면)

    '빛의 호위'에서 조해진은 “나와 나의 세계를 넘어선 인물들”과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소통”하고 “유대를 맺”(‘작가의 말’ 267면)으며 타인의 생애에 따뜻한 빛을 드리운다. 조해진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우리의 삶에는 ‘빛의 호위’를 받는 순간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는 걸 언제까지고 기억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순간들이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하는 빛”(「빛의 호위」 23면)이 되어주고,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한기욱, 해설) 할 것임을 믿는다. 그날에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산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도 한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생애에는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 표현되는 순간보다 훨씬 더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야기 너머로 뻗어가는 지평에 수많은 문장과 생각과 감정이 흩어졌다가 모이며 또하나의 작은 길이 되어가는 상상은, 언제나 두려울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
    이제야 나는,
    진짜 타인에 대해 쓸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작가의 말’ 266~267면)

    조해진 지음 | 창비 | 268쪽 | 12,000원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 '벌거숭이들'이 출간되었다. 주인공인 치과의사 모모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 간의 잔잔한 듯 격렬한 일상이 펼쳐진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 무수히 얽혀 등장한다. 이들은 때로 가까운 사람의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 이 ‘가까운 사람’에는 자기 자신 또한 포함된다. 수더분하고 말 많은 아줌마인 줄로만 알았던 엄마가 사실은 인터넷상에서 ‘로잘리’라는 닉네임으로 로맨틱한 만남을 가져왔단 걸 알게 된 딸, 수십 년간 부부로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서로에게 진심으로 관심 가져본 일이 없었다는 걸 중년이 지나서야 깨달은 부부, 바람 상대에게 푹 빠져 오래 만난 약혼자에게 이별을 고했지만 바람 상대 또한 온전히 마음을 채워주는 애인은 될 수 없단 걸 알게 된 여자, 무슨 문제가 생겨도 살이 닿기만 하면 풀리는 속궁합을 자랑하는 부부지만 마음으로 건네는 대화는 통 들어먹질 않는 남편을 가진 여자 등등…….

    각자 처한 상황과 시점에 따라 타인에 대해 품는 인상이 다르다는 점은 보편적인 사실이지만, 독자로서 제삼자가 되어 지켜보노라면 다소 난감하다. 히비키가 ‘지적이고 우아하며 상냥하다’고 하는 유키(모모의 엄마)는 사실 딸들로부터 ‘가식적이고 독선적인 고집불통’으로 평가받으며 외면당한다. 그런데 유키는 남편 에이스케에게는 이해심 많고 한결같은 아내이다. 또 인터넷 채팅에서 만난 여자와 바람이 나서 가족을 버리고 새 살림을 차린 무정한 아빠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조용하고 온순하며 귀여운 구석이 있는 초로의 남자일 뿐이다.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히는 오빠가 엄마의 눈에는 그저 다정하고 기특한 아들이고, 요령도 없고 고집 세고 반항적인 딸이 누군가의 눈에는 인정 많고 진중한 사람이다. 독자는 점점 등장인물들에 대해 어떻게 판단 내려야 할지 혼란스러워지고,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안쓰러운 사람인지 행복한 사람인지 판단하기가 곤란해진다.

    남자 친구, 여자 친구, 절친한 친구, 부인, 남편, 엄마, 아빠…… 관계에 이름을 붙여 서로를 안전하게 규정하려 하지만 누군가를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모두 어떻게든 이리 엮이고 저리 엮여 살아가야 하기에, 엇갈림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언제든, 어떤 사이로든 변할 수 있다면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혼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기에 서로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부분’뿐이다. 연애도, 결혼도, 우정도, 동료도, 그 ‘부분’이 전부인 양 기대어 있다가도 어느 순간 또 다른 ‘부분’에 실망하고 절망해 등을 돌리기도 한다. 이렇게 불투명한 관계들 사이를 이리저리 떠돌면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당혹감과 고독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거리낄 것 없이 당당한 벌거숭이들을 만나게 된다.

    책 속으로

    1년여 전, 그야말로 맨몸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무렵, 이 집의 분위기 - 카즈에 자신과도 비슷해서 꾸밈없고 소통이 잘되는 분위기 - 에 야마구치는 살 것 같았다. 자신의 인생에 이런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니, 라는 신선한 놀라움. 이곳이 나의 마지막 정착지다, 라는 감상을 야마구치는 즐겨 입 밖에 냈고(그 말을 듣는 것이 카즈에도 기쁜 눈치였다), 거기에는 약간 자학적인 기분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 가와사키 집에 비하면 이 오래된 집은 많이 보잘것없었기에 -, 그래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고, 후련하면서도 일종의 밝고 평온한 기분에서 비롯된 말이기도 했다. ‘내 인생에 이런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니’라는 신선한 놀라움은 ‘이런 여자가 기다리고 있어주었다니’라는 신선한 기쁨과 동의어이며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_본문 127쪽

    사바사키는 히비키를 떠올리고 있었다. (……) 모모에게 들었던 사전 정보로는 좀 더 살림때가 묻은 여성이겠거니 싶었다. 남의 평판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시끄럽고 독선적인 여성을. 하지만 실제로 본 히비키는 완전히 달랐다. 사춘기 아이처럼 어설프고, 사춘기 이전의 아이처럼 겁이 많아 보였다. 모모 짱도 겁이 많지만 그 이상이다. 모모의 두 다리 사이에서 사바사키는 생각한다. 히비키를 생각하고 있지만, 몸은 자연스레 모모와의 행위에 몰두할 수 있었다. 호흡이 맞는 것이다. 모모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세운다. 목소리를 내진 않지만, 몸을 젖히는 방식이나 손의 힘 - 모모는 가끔 침대를 두드린다. 사바사키에게 매달릴 때도 있고 두 팔을 위로 올려 헤드보드를 움켜잡으려 들 때도 있다 - 으로 사바사키를 몰아붙인다. 모모의 팔다리는 매끄럽고 피부는 거리의 비 냄새 비슷한 냄새가 난다. 발톱은 늘 연한 두 가지 색상으로 나눠 칠해져 있다. 직업상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를 수 없다며 본인은 아쉬운 듯 말하지만 사바사키는 모모의 손이 좋다.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은 손톱도. 히비키는 작은 손을 지니고 있었다. 마디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화과자 같은 손이었다. 절정으로 치달은 후, 사바사키의 가슴에 맨 먼저 퍼진 것은 팔랑팔랑 부지런히 움직이는 히비키의 그 작은 손이었다.
    _본문 168~169쪽

    “헤어져버리면 되잖아.” 남편이 나갔을 때 딸 미토코는 그렇게 말했다. “최악이야, 이런 거”라고 불쾌한 듯이. 미사코는 자신이 비난받는 기분이었다. 애인을 만든 것도 집을 나간 것도 미사코는 아닌데. 분명 사이좋은 부부라고는 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거의 결혼 직후부터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 싸울 기력조차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아온 세월이 없어지는 건 아닐 터. 체념과 습관과 타협의 산물이었다 해도 켜켜이 쌓여온 이 세월이. “아르고, 이리 와.” 미사코는 개를 부르고 현미차를 마저 마신다. 차는 둥글둥글한 맛이 났다. 둥글둥글한, 어릴 적부터 잘 아는 맛이. 미사코는 여름에도 따뜻한 음료가 좋다. 남편은 차가운 보리차나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싶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요 몇 년, 그런 것들을 만들지 않았다는 생각을 멍하니 떠올렸다.
    _본문 182~183쪽

    에쿠니 가오리 지음 | 신유희 옮김 | 소담출판사 | 336쪽 | 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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