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최근 2년 간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에 대한 전 사회적 민감도가 높아졌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문화를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비평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들도 진행되고 있다. 성균관대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가 주관하고 성균관대 문과대학 CORE사업단이 후원하는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도 그 흐름 중 하나다. 한국문학과 민주주의에 대해 의미 있는 성찰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만들어진 이 강의는 13일부터 24일까지 평일 열흘 동안 이어진다. 총 10강을 지상중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남성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방탕하고 문란한 '신여성'② '독립적 존재' 대우 못 받은, 식민지 조선의 '배운 여자들'③ 70년 전,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여성들④ 소녀상, 누드, '눈길'과 '귀향'… 위안부가 표현되는 방식⑤ '교란된' 젠더, 이성애 거부하는 남성과 '남장' 여성의 등장<계속>
1950년대는 혼란의 시기였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은 3년이나 이어졌고, 한국사회는 전쟁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우선 수많은 남성들이 전쟁터에 나갔다가 죽거나 다쳐서 돌아왔다. 생계를 위한 벌이는 여성의 몫이었고, 자연히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다.
전쟁에서 싸우고 돌아온 남성들의 용맹함을 찬양하고,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여성들이 사치스럽다고 비난하는 흐름이 1950년대의 '스테레오타입'이었다면, 이 흐름을 뛰어넘는 새로운 모습도 등장했다. '남자다운' 것에서 동떨어져 있고 이성애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기까지 하는 남성 화자가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가 하면,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국극 극단에서 남성 역을 맡은 배우가 인기를 끌었으며, 남장한 여성과 여장한 남성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17일 '멜랑콜리아, 1950년대 한국문학의 퀴어한 육체들'을 발제한 허윤 연구자(말과활 젠더팀 편집위원)는 작가 손창섭의 작품 속 남성 주인공과 여성 국극, 각각 남장과 여장을 한 여성과 남성을 '젠더 교란'의 사례로 소개했다.
◇ 여성에 대한 공포와 이성애 거부로 나타난 손창섭의 '이질성'
손창섭의 소설 '공휴일'의 주인공 도일은 여성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다. (사진=김수정 기자)
교과서에도 실린 소설 '비 오는 날'로 유명한 손창섭은 모든 교육을 일본어로 받은 인물이었다. 허 연구자는 "손창섭은 일본어로 구상해서 한국어로 쓰는 사람이었기에 사유 자체가 이질적이었다"고 말했다.
허 연구자는 "손창섭은 '인간 및 사회에 대한 불신과 반발, 신에 대한 원망, 만신창의로 적의만 남은 불구의 패잔병, 기성 권위에 대한 억압된 인간적 자기발산이 문학 형태로 나타난 것, 말하자면 그게 나의 소설이라 하겠다'는 입장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화자는 여타 문학작품에서 보기 드문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여성에 대한 공포'와 '이성애 거부'다. 허 연구자에 따르면 손창섭의 소설에는 이른바 '정상가족'으로 결혼하는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
'공휴일'의 주인공 도일은 자신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금순을 공포스러워하며, 결혼과 아버지 되기에 대해 큰 부담을 진 인물이다. 여자와 가까이 있을 때마다 "살찐 돼지의 허연 비곗덩이가 눈앞에 어른거려 입안이 다 텁텁해지기도" 할 만큼, 여성에 대한 강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손창섭의 소설 '공휴일'과 '생활적'의 주인공들은 결혼에 큰 관심이 없고 오히려 부담스러워 한다. (사진=김수정 기자)
'생활적'의 주인공 동주도 비슷한 캐릭터다. '생활적'에서 춘자는 동주를 "가만두지 않는" 성욕이 많은 여성으로 그려지는 반면, 동주는 그러한 춘자를 마침내 징그러워하는 남성으로 나온다. "심신이 걸레 조각처럼 되는 대로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무기력한 인간이기도 하다.
허 연구자는 "(손창섭은) 이성과의 섹스 묘사를 거의 하지 않는다. 모든 주인공들은 여성이 접근하면 끔찍해하는데, 여성들은 성욕이 강하게 나온다"며 "손창섭 텍스트에는 완전히 거세된 남성의 비틀어진 욕망이 나온다. 정상적인 것은 욕망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허 연구자는 "누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이성애를 거부한 적이 있었는가. 한국 문학에서 이성애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정상적인 이성애 중심성에서 가장 탈피해 있는 작가가 손창섭"이라고 소개했다.
그렇다면 이성애에 천착하지 못하고 무력한, 남다른 남성 화자가 등장한 배경은 무엇일까. 허 연구자는 "젠더 규범이 강화·재생산되기를 바랐으나 현실에서는 (그 역할을) 아무도 수행할 수 없어, 퀴어한 방식의 젠더 역전과 교란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남성 주체들이 비헤게모니적으로 사는 모습도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 엄청난 인기 끈 남역 배우들, '필요'에 의해 등장한 남장 여장
여성으로 이루어진 극단에서는 극중 남녀 배역 모두를 여배우가 맡는다. (사진=김수정 기자)
1950년대에 등장한 또 다른 '퀴어'한 장면은 '여성 국극단'에서 나왔다.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극단이었기에 국극(우리나라의 고유한 연극, 창극이라고도 함)에 나오는 모든 배역을 여성들이 수행해야 했다. '춘향전', '왕자호동', '로미오와 줄리엣' 등 남녀 성역할이 굉장히 구분돼 있으면서도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주로 상연되었는데, 이때 남성 역할을 맡은 배우가 특히 인기가 높았다.
허 연구자는 "(여성 국극단은) 남성은 실제 남성보다 더 남성 같아야 하고 여성은 실제 여성보다 더 여성다워야 한다는 방향이었다"며 "칼싸움, 춤추는 장면뿐 아니라 남성 역할 배우 중심의 커플링이 이루어지는 애정연기가 상연됐다. 1950년대 상황에선 그런 식의 로맨스드라마가 불가능했던 만큼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됐다"고 설명했다.
여성 국극단에서 남성 역할 배우로 큰 인기를 끈 조금앵은 열성팬과 함께 가상결혼식을 치르고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사진=김수정 기자)
당시 여성 국극단의 남역 배우에 대한 반응은 현재 아이돌 팬덤을 떠올리게 할 만큼 열광적인 것이었다. 가장 사랑받았던 남역 배우 조금앵은 열성팬의 요청으로 가상결혼식을 치러 기념사진을 남겼다. 수익 배분 구조가 불균형해 극단 운영자만 돈을 벌자, 팬들은 돈을 모아서 배우들에게 용돈을 찔러주고 밥과 옷을 사 주었다는 것이 허 연구자의 설명이다.
또한 허 연구자는 "현재 국극과 창극은 팬덤도 약하고 무형문화재처럼 여겨지지만, 1950년대에는 대중적인 장르였다. 배우들 얘기가 잡지에 연일 보도되기도 했고. '젠더 교란'의 장르가 대중예술로서 가장 인기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이밖에도 '여장 남자'와 '남장 여자'는 '필요'에 의해 등장했다. 판촉 행위를 하기 수월하다는 이유로 남장을 해 여성들에게 크림을 판 여성이 있는가 하면, 여성보다 할 수 있는 일이 적었던 상황에서 생활고에 몰려 여장을 하고 카페·술집·다방 여급이나 식모를 하는 남성도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