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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대마초 사건이 없었더라면, 대중가요는?



책/학술

    1970년대에 대마초 사건이 없었더라면, 대중가요는?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대중문화로 보는 박정희 시대'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는 대중문화, 그중에서도 박정희 시대의 대중예술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대중예술이라는 문화를 매개로 박정희 시대의 역사를 보고자 한다. 대중예술뿐만 아니라 문화로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문화를 인간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으로 폭넓게 보기 시작하면, 역사를 문화로 읽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무슨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갔는가’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살펴보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미자의 대중가요 〈동백아가씨〉는 1960년대 초반의 복잡한 정치적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화려하게 솟아올랐다가 사라진 노래다. 그리고 이 노래가 솟아올랐다가 사라진 과정을 뜯어보면, 민심의 흐름과 이를 고려한 집권자들의 ‘잔머리’의 향방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동백아가씨〉는 1960년대 초에 잠시 주춤했던 트로트 양식과 신파적 미감이 1960년대 후반에 다시 막강한 힘으로 떠오르게 되는, 그 분기점에 있었던 노래라 할 수 있다. 즉 1964년에 〈동백아가씨〉의 ‘대박 히트’를 계기로 트로트는 부활의 기선을 쥐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시기에〈동백아가씨〉는 금지곡이 되었으니 그 이유는 ‘왜색(倭色)’, 즉 일본색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트로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들어와 정착된 것인데, 겨우 몇 년 동안 주춤했던 이 경향이 보란 듯이 다시 솟아올랐다. 게다가 전주의 기타 반주는 일본 엔카의 거장으로 통하는 고가 마사오 스타일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때는 정부가 한일수교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해 온 사회가 술렁거리고 있던 때였다. 이런 여론의 흐름에서 가장 공격받기 쉬운 것은 바로 대중가요였다. 그러면서도 가장 대중적이었으니 대표로 얻어맞기 딱 좋은 대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동백아가씨〉가 표적이 되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1970년대 대학생과 청소년을 중심으로 전통문화나 한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문화적 실천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이는 수십 년 동안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문화의 식민주의적 성격에 대한 다소간의 비판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시기 청년들의 ‘우리 것 찾기’ 붐은 훨씬 더 쉽게 확인된다. 이때부터 대학에서 탈춤반이라 통칭되는 동아리들이 생겨나고, 대학생들이 판소리 감상회나 탈춤 공연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청년문화의 ‘버터 냄새’가 못마땅한 대학생들에게 전통예술은 명분과 재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매우 흥미로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은 ‘전통문화 계승’과 ‘민주문화 창조’를 핵심적 가치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1970년대에 방송사의 가요제까지 이런 소재가 우수수 등장할 정도로 전통 민속문화가 고학력 젊은이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중가요 관계자들은 ‘1970년대에 대마초 사건이 없었더라면, 한국 대중가요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1974~1975년에 절정에 도달한 청년문화가 그해 12월의 대마초 사건이 없었다면 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을 것이라 보는 것은 다소 순진한 생각이다. 청년문화의 유행이 대도시의 고학력 청년들에게 한정된 현상이었다. 어찌 보면 대마초 사건으로 대표되는 정권의 여론몰이가 그럭저럭 먹힐 수 있었던 것도 청년문화 취향 바깥에 결코 적지 않은 사람이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신 말기의 대중문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진보적 대중문화의 본격적 형성이다. 특히 민중가요라는 노래문화가 대표적이다. 이 민중가요 문화의 출현이란 진보적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가수가 출현했다거나, 혹은 시위 현장에서 노래가 불리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어느 시위 현장에서나 노래는 존재한다. 사람들이 모여서 행진을 하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일은 꽤나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유신 말기의 폭압적인 상황은 젊은이들을 어느 방향으론가 몰고갔고, 작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이후 한국 예술사에 큰 영향을 남겼다.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는 박정희 정권이 만든 것이지만, 그 여파는 전두환 시대를 거쳐 노태우 시대까지 이어졌다. 박정희가 뿌린 씨앗을 노태우가 허덕거리며 거두고 있었다. 심지어 박근혜까지 그 몫을 감당하고 있다. 이러니 역사란 얼마나 엄중하고 무서운 것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책 속으로

    이들은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대놓고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고 용기 있는 그들에게 때때로 박수도 보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박정희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한 채 청년 특유의 혈기방장함에서 비롯된 저항적 포즈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장발을 하건 기타를 두드리며 다소 건방을 떨건, 박정희 정권이 이들을 포용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이들이 반정부 구호를 외치지 않는 이상 이들의 문화적 자유주의를 그저 모른 척하고 포용했더라면, 청년문화적 대중예술의 평범한 팬이었던 이들까지 '정권이 해도 너무한다'라는 생각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미 경직되기 시작한 박정희 정권은 그러지 못했다. 성향도 위상도 전혀 다른 김민기와 이장희와 신중현이 같은 해(1975년)에 퇴출되었다는 것은 후일 한국의 청년문화와 정치적 진보성의 복잡한 관계를 실제보다 과장되게 혹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해석하도록 했다. 「청년문화와 정치적 진보성은 어떤 관계였는가?」(본문 309~310쪽)

    『자유부인』은 이러한 대학교수 부부의 세태를 ‘사바사바’, ‘뒷돈’을 먹고사는 공무원, 부자 스폰서와 공생하는 국회의원, 심지어 돈 봉투를 들이밀며 성적을 올려달라는 대학생과 이를 받아 챙기는 교수 부인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만들어내는 인간들과 버무려놓는다. 당시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 황산덕이 『자유부인』을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라고 비난한 것은 단지 춤바람을 다룬 까닭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갖은 재롱을 다 부려가며 대학 교수를 모욕’했다는 분노 어린 표현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교수 부인의 타락을 그린 것뿐만 아니라 이 소설이 소설 속에서 가장 도덕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장태연 교수마저 ‘미스 박의 하얀 종아리’에 한눈을 파는 인물로 그린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유부인만 춤을 춘 건 아니다」(본문 57~58쪽)

    이영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400쪽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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