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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세계에서 가장 큰 소 키우고 자주 먹었다"

책/학술

    "조선시대, 세계에서 가장 큰 소 키우고 자주 먹었다"

    식민지근대화론? 조선시대 연구자로서 납득할 수 없어

    - 조선시대, 경작지 개간으로 한반도 생태환경 급속히 변화
    - 호랑이 1만마리 있었을 듯, ‘호환’ 걱정해 정부 차원에서 포획
    - 조선 후기, 소 100만 마리 사육 추정
    - 가축 전염병 ‘우역’ 발생 때는 소 먹지 말라
    - 일제시대, 이 부분만 강조해 배고픈 조선백성 이미지 심어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9:05~19:50)
    ■ 방송일 : 2017년 02월 27일 (월) 오후 19:05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김동진 교수 (교원대학교)

    ◇ 정관용> 호랑이는 일제시대 때 일본 포수들 때문에 이 땅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죠. 그런데 그게 아니랍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호랑이 개체수가 감소했다. 이게 사실이라고 하고요. 또 하나 충격적인 것은 우리 국민들이 소고기를 1995년이 지나서야 조선시대 우리 백성들이 소고기 먹던 양을 넘어서기 시작했답니다. 다시 말하면 1995년 이전에는 조선시대 백성들이 더 소고기를 더 많이 먹었다. 이런 이야기인 거죠. 이런 충격적인 사실들 누가 밝혀냈을까요? 조선시대 생태환경사라고 하는 귀한 연구서를 들고 오신 분인데요. 교원대학교 김동진 교수를 오늘 스튜디오에 초대했습니다.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 김동진> 반갑습니다.

    ◇ 정관용> 생태환경의 역사를 조선시대, 그 이전 이런 것까지 연구한다는 것 자체를 저는 몰랐습니다. 언제부터 이런 연구를 하셨어요?

    ◆ 김동진> 저는 이 연구가 제가 연구를 시작할 때부터 관심을 갖고 연구를 했던 부분입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우리 조선시대를 보는 시각에서 일제시대부터 이른바 한국사 정체성론이라는 주장이 있었는데. 조산시대 한국의 역사적 발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른바 고대 노예제도 사회와 같은 저열한 사회였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조선에 대한 혜택이다라는 것이 일본 총독부, 조선사 편집부에서 이제 우리한테 가르쳐주고 강요했던 하나의 기억의 문제이죠.

    ◇ 정관용> 그리고 그게 식민지 근대화론하고 연결되는 것이죠.

    ◆ 김동진> 그것이 이제 최근에 일부 사회경제사 연구자들이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걸 주장하면서 일제시대에 와서야 우리가 제대로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주장을 했는데. 저는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오랫동안 자료를 봤지만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또 저희는 그냥 자료 조사를 위해서도 현장에 가서 많은 주민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의 얘기를 듣는데 제가 만난 분들이 아마 친일파나 지주가 아니어서 그렇겠지만 일제시대에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분은 거의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이것이 뭔가 문제가 있구나. 그래서 우리가 조선시대에 어떤 역사가 있었고 그래서 왜 우리가 해방 공간에서도 농지개혁을 중시하고 또 북한의 김일성 같은 경우는 밀밥에 고깃국을 강조하고 1970년대에서는 박정희는 우리가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자기의 최대 치적이라고 이렇게 내세우고. 이런 것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했죠. 또 하나는.

    ◇ 정관용> 조선시대에 진짜 백성이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는 생태환경을 연구해야 나오는 거죠?

    ◆ 김동진> 그렇죠. 그것이 두 번째 답과 관련이 되어지는데 지금까지 이제 사회경제사 연구가 주로 농업사를 중심으로 진행이 됐습니다. 그런데 한국이라고 하는 지역의 중요한 특성은생태자원이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지역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농산물을 이용하기 전부터 야생에 또는 천연의 여러 자원들을 이용했고 그것은 아주 최근에도 마찬가지고 저도 어렸을 때 기억으로 저희 어머니가 봄에 나물을 뜯고 가을에 도토리 채취한 것이 농사짓는 수확물보다 더 많았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 정관용> 맞아요, 맞아요.

    ◆ 김동진> 그래서 그렇다면 한국 사회경제사를 정립하는 것은 벼놓사, 일부 밭농사 이것으로 설명하는데 그쳐서는 안 되고 야생의 생태 자원을 이용할 수 있었는가 하는 부분까지 설명을 해야 올바른 한국의 사회경제사가 정립이 된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사회경제사를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고 박사논문으로 쓸 때 구상을 했는데 이게 분량이 너무나 방대해서 일단 박사논문을 포호정책연구라는 주제로 하고 후속 연구로 계속 진행을 한 것입니다.

     



    ◇ 정관용> 호랑이의 개체 수, 소의 두수 자료들이 다 있습니까?

    ◆ 김동진> 그렇습니다. 자료를 근거로 추산을 해 본 겁니다.

    ◇ 정관용> 어떤 자료들에 이런 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 김동진> 예컨대 호랑이 문제, 엄격한 의미에서는 범과 표범 이렇게 말을 해야겠지만 우리가.

    ◇ 정관용> 호랑이하고 표범까지?

    ◆ 김동진> 포호정책이라는 것은 경국대전에 포호조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법률적으로 호랑이를 잡도록 되어 있는 거죠. 그런데 거기서 나눠놓은 법적 규정이 세 가지 동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범이고 두 번째가 표범이고 세 번째가 시라소니.

    ◇ 정관용> 시라소니.

    ◆ 김동진> 시라소니는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흔치 않았던 거고 범과 표범이 대부분이고 그것이 사람과 가축을 해쳤기 때문에 국가가 정책적으로 잡도록 했고 그것이 경국대전이라는 법전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으로 치면 헌법에 호랑이 잡아라 이렇게 실려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

    ◇ 정관용> 그래서 1년에 몇 마리 잡았는지 이런 자료가 또 있어요?

    ◆ 김동진> 그렇죠, 1년에 모든 군현에서 호랑이 또는 표범 3마리씩을 잡아서 그 가죽을 벗겨서 국왕에게 바치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추산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조선시대 전국 각 군현이 한 320~330개 정도 되니까요. 각 군현에서 3장씩 바쳤다면 한 1000장 정도는 바쳐야 된다. 그러니까 1000마리를 죽여도 그게 15세기,16세기 별 문제없이 작동을 했습니다. 그러면 200년 동안 1000마리씩 잡아도 어느 정도 숫자가 유지될 정도의 기본적인 개체수가 있어야 된다. 그래서 제가 볼 때 그 최소 개체 수는 한 4000~6000마리 일거고 아마도 그게 안정적으로 200년 이상 유지된 걸로 봐서는 적어도 1만 마리 이상은 있었을 거다 이렇게 추산을 했습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전체 호랑이 개체 수를 이렇게 조사를 해서 기록해 놓은 자료는 있지만.

    ◆ 김동진> 그것은 있을 수가 없죠.

    ◇ 정관용> 이렇게 잡은 개체 수 . 그것이 매년 1000마리씩 잡았다는데도 유지가 됐다 이렇게 추정을 하셨다.

    ◆ 김동진> 그렇죠, 번식률을 계산해서 계산하면 계산이 가능하니까요.

    ◇ 정관용> 그러니까 조선시대 초기부터 호랑이를 전격적으로 잡기 시작했습니까?

    ◆ 김동진> 그렇습니다.

    ◇ 정관용> 이유는 뭡니까?

    ◆ 김동진> 그게 위민재해라고 이렇게 써 있습니다. 백성에게.

    ◇ 정관용> 해를 주니까.

    ◆ 김동진> 해를 주는 건 없애야 된다 이런 거죠. 백성을 위해서 해로운 것을 없앤다. 일제시대 해수구제라고 이렇게 했는데. 그 말 자체는 조선시대 위민제라는 개념을 좀 따서 약간 변경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정관용> 또 한편으로서는 농업이 발전하면서 경작지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서 호랑이랑 사람이랑 부딪히게 되는 횟수가 늘어나고 이런 것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 김동진> 그렇습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요. 이 조선시대는 고려시대나 또 서양의 중세 다른 나라들과 달리 숲에 대해서 다른 지역과 다른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일반 백성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특권층들이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이었거든요. 그런데 조선 같은 경우는 민본정책이라는 것을 다른 분들은 하나의 허구적인 이념으로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민본정책은 어떻게 실현이 됐느냐. 바로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어떤 수단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는 나라 안에서 자유롭게 이용하라. 그런 평지숲이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대부분 무엇으로 쓰어졌느냐면 군사훈련장 그리고 강무장이라고 하죠. 또는 사냥터. 또는 시초채취지라고 해서 시라는 건 땔감이고 초라는 것은 우마를 먹이는 데 필요한 먹잇감. 그런 것을 채취하는 땅으로 쓰였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제 거기가 조선시대부터 대규모 경작지로 전환이 되었고.

    ◇ 정관용> 개간이 됐고.

    ◆ 김동진> 그곳은 야생동물에게는 반대의 의미가 되죠.

    ◇ 정관용> 그렇죠. 도망쳐야죠.

    ◆ 김동진> 야생동물이 아주 편하게 살던 공간인데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공간으로. 바로 그것 때문에 호환이라는.

    ◇ 정관용> 그게 더 빈번해지고.

    ◆ 김동진> 아주 극단적인 호환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는 겁니다.

    ◇ 정관용> 그래서 정책적으로 호랑이를 잡아라.

    ◆ 김동진> 그렇죠. 개간하려면 호랑이를 잡아야 되는 거죠.

    ◇ 정관용> 호랑이 잡는.

    ◆ 김동진> 군사조직이 편성이 됩니다.

    ◇ 정관용>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 김동진> 처음에 척호갑사는 적은 수에서 한 20~40명에서 시작했는데 나중에 400명까지 늘어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정착되고 호랑이 잡는 기술이 확립이 되고 보급이 되어 지면서 그것이 각 지방에 군현까지 이제 호랑이 잡는 사람들을 설정해서 운영을 하는데 그것을 착호인이라고 부릅니다. 착호인이 전국적으로 1만 명 정도 운영이 되어집니다.

    ◇ 정관용> 대단하군요.

    ◆ 김동진> 그러니까 적어도 1만 명 이상의 호랑이 잡는.

    ◇ 정관용> 전문사냥꾼.

    ◆ 김동진> 전문사냥꾼들이 있었죠.

    ◇ 정관용> 그 사람들이 1년에 호랑이 잡는 게 15세기, 16세기라고 하는데. 그러면 17세기, 18세기로 접어들면서 호랑이 개체 수가 줄었나요.

    ◆ 김동진> 그렇습니다. 17세기부터는 호랑이를 잡지 못하는 지역이 15~16세기 지역에서는 일부 지역이 있었는데 17세기, 18세기부터는 전지역으로 확산이 됩니다.

    ◇ 정관용> 조선시대 개간 이후 활발하게 진행되고 농지가 확대되고 그러면서 야생동물과 사람의 접촉이 불가피하게 늘어나고 호환이 발생하니 정책적으로 잡기 시작해서 급감했군요.

    ◆ 김동진> 그렇죠.

    ◇ 정관용> 일제시대 때 한꺼번에 싹 사라진 게 아니로군요, 확실하게.

    백두산호랑이 (사진=자료사진)

     



    ◆ 김동진> 그렇죠, 그런데 거기서 더 결정적인 계기가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역이라고 하는 사건인데요. 우역이라는 것은 질병 이름이지만 하여튼 야생동물에게는 제가 볼 때는 엄청난 사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라고 봐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게 우역이라는 것은 원래 사람들이 신석기 시대부터 농사를 지를 때 소를 가축화시키면서부터 야생동물로부터 자연스럽게 들어왔던 겁니다. 그런데 그게 이제 오랫동안 계속 사람들의 가축 속에서 이렇게 전염병이라는 것이 만연을 하다가 이게 독성이 너무 강하면 그 전염병은 숙주를 다 죽이기 때문에 그것서 계속 존재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점점 독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적응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중종 대, 1540년대에도 우역이 발생을 하는데 그때 나오는 자료를 통해서 이게 어느 정도의 소가 죽었느냐, 감염됐을 때.

    ◇ 정관용> 우역이 그러니까 소가 걸리는 병, 그런 병이에요?

    ◆ 김동진> 소가 걸리는 병인데 그 병 중에서도 아마도 우리가 린더패스트라고 불리우는 우역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그러니까 치사율이 워낙 높아서 다른 전염병하고는 확연히 구분이 되는 거죠.

    ◇ 정관용> 요즘 구제역하고 비슷한 거예요?

    ◆ 김동진> 그것하고 비교하면 우역이 상당히 서운해 할 정도로 치사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그러니까 구제역에 걸리면 소고기가 좀 맛이 없어진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데. 우역에 걸리면 다 죽는다. 이렇게 되는 거니까 그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 정관용> 좋습니다.

    ◆ 김동진> 그러니까 그 시대, 중종 대는 치사율이 한 20%~30% 그런 수준이고. 그게 1635년 정도까지는 그런 선을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1635년 5월에 심양에서 우역이 발생했습니다. 그해 1635년 5월이었는데 그 우역이 8월에 평안도에 들어오고 그 이후에 한반도에 전반적으로 확산되는데. 거기에 걸린 소들은 거의 적어도 96, 97%. 95%가량이 죽습니다. 그러니까 걸리면 다 죽는다는 것이 당시의 표현이죠.

    ◇ 정관용> 그 우역이 호랑이 개체 수 감소와 직접적으로 연결이 돼요?

    ◆ 김동진> 직접적으로 연결이 됩니다.

    ◇ 정관용> 어떻게요?

    ◆ 김동진> 그런데 그 우역이라는 것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냐고 하면 우제류라고 해서 짝발굽 짐승들에게 다 감염이 됩니다. 소나 짝발굽 짐승이라 걸리고 말은 통발굽 짐승이라 안 걸립니다. 돼지는 걸립니다. 그런데 그 야생동물에서 사슴과 노루, 멧돼지 이런 것이 짝발굽 짐승인데 호랑이의 먹이가 됩니다. 그런데 그게 이제 특히 사슴이 취약한 것이 노루는 따로 따로 생활하니까 걸려도 한두 마리만 죽는데. 사슴은 한 200에서 500마리씩 집단 생활을 하니까 한 번 전염이 되면 그 집단 자체가 몰사하게 되는 거죠.

    ◇ 정관용> 그걸 호랑이가 먹고 호랑이도 죽고.

    ◆ 김동진> 그러니까 그걸 먹고 호랑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게 죽고 나니까 호랑이가 먹을 것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굶주린 호랑이들이 마을로 내려오는데. 그 이전과 달리 미친 듯이 가로세로 뛰어다닌다, 마을 안에 들어와서. 그러니까 호랑이가 미치게 된 게 바로 굶주림 때문인 것이죠.

    ◇ 정관용> 소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소, 조선시대 초기에 몇 마리쯤 키우던 게 조선시대 말에는 몇 마리로 늘어났습니까?

    ◆ 김동진> 그게 기록상으로 볼 때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이제 세종 때 무렵에 대략적으로 한 3만 마리쯤 있었다, 이렇게 보는 게 통설입니다. 그런데 중종 대 기록에 보면 50만 마리 이상으로 늘어난 것으로 보이고. 17세 중엽, 숙종 대 무렵부터 18세기 중협에 이를 때는 많이 추산하면 120만에서 130만 마리 이상으로 늘어난 것 같고. 보수적으로 잡아도 100만 마리는 넘는다. 이렇게 될 정도로 숫자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 정관용> 그때 조선의 인구가 얼마 정도였죠?

    ◆ 김동진> 임진왜란 전후한 숫자가 1500만 정도. 일제 초가 1700만에서 1900만 정도로 보는데요. 대체로 1700만 선정도 되는 것으로 이렇게 봅니다.

    ◇ 정관용> 중간 잡아서 1600만 인구에 100만 마리가 넘는 소를 키웠다. 지금 우리나라의 소가 몇 마리나 지금 있습니까?

    ◆ 김동진> 지금 한 334만 마리로 통계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 정관용> 그럼 5000만 명 인구에 300만 넘는 소하면 1600만에 100만 마리와 거의 비슷하네요.

    ◆ 김동진> 그렇죠, 대개 15마리에 소 한 마리 정도의 숫자니까.

    ◇ 정관용> 그럼 조선시대 백성들도 소고기를 많이 먹었어요?

    ◆ 김동진> 기록에 보면 그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 정관용> 양반만이 아니고?

    ◆ 김동진> 그런 것 같습니다.

    ◇ 정관용> 그래요?

    ◆ 김동진> 이미 16세기 때 묵제일기를 보면 이문건에게 소고기를 바치는 사람들을 제가 쭉 조사를 해 봤는데 백정은 당연히 잡는 축에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일반 농민들 중에서 다수가 이렇게 뇌물이든, 선물이든 여러 형태로 이문건에게 소고기를 바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문건이 부인이 병에 걸렸을 때 처방을 내리는데 처방의 내용이 소고기를 먹지 마라입니다. 저도 그것을 읽고서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어쨌든 얼마나 소고기를 많이 먹었는지.

    김동진 한국교원대 교수 (사진=시사자키제작팀)

     



    ◇ 정관용> 우리 머릿속에 잘못된 인식이 너무 강하게 박혀 있군요. 우리는 소는 농사일을 해야 하는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농민들은 소는 1년에 한 번도 먹기 힘들다. 잔칫날이나 조금 먹어본다. 그래서 소고깃국 먹고 나면 기름기 못 먹던 사람이 먹어서 쫙쫙 설사를 한다. 이런 게 뇌리에 박혀있는데 그건 일제시대 후군요.

    ◆ 김동진> 제가 볼 때는 그렇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고기를 먹지 말라는 이유가 강조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역이 발생해서 일시적으로 30년 주기로.

    ◇ 정관용> 급감하니까.

    ◆ 김동진> 소가 없어졌을 때 절대로 소를 먹지 말라. 이런 강력한 정책을 시행합니다. 그게 역사적 기록에 나오는데 아마 일부 연구자들이 그런 기록을 중심으로 모아 놓으니까 조선시대에는 내내 소고기를 못 먹었다,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 정관용> 그렇군요. 그리고 아마 일제시대에 조선역사를 왜곡하면서 일부러 그런 걸 퍼트렸을 수도 있죠.

    ◆ 김동진> 그렇죠.

    ◇ 정관용> 처음에 말씀하신 것처럼.

    ◆ 김동진> 제가 보기에는 그렇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서 그냥 그때부터 소고기를 먹었으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쓴 것 같습니다.

    ◇ 정관용> 이 책이 강하게 주장하고 계신 바가 우리는 우리나라의 생태환경이 근대화 이후에 급속히 변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산업화, 도시화되고 이러면서. 오히려 조선시대 15세기에서 18세기 그 사이가 생태환경이 가장 급속하게 변한 걸로 봐야 한다, 맞습니까?

    ◆ 김동진> 그렇죠, 원시림에 가까운 한반도에 숲이 거의 초원에 가까운 상태로 바뀐 것은 조선시대 500년을 거치면서고. 오히려 우리 숲이 다시 복원되는 것은 60~70년대 산업화 이후에 다시 원시림으로 복원돼 가고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고려시대까지는 그렇게 농경지가 많지 않았었나 보죠?

    ◆ 김동진> 그렇죠, 그래서 그 당시에 소나무 사람들이 많이 살고 훼손된 지역에서 소나무가 자랍니다. 그래서 소나무가 자라는 지역이 마을 주변이고 극히 일부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제 바닷가 그다음에 태백산맥 이런 지역을 제외하고는. 그런데 조선시대가 되면 소나무가 자라는 지역이 대부분의 지역으로 바뀌게 되죠. 그것이 이제 바로 사람들에 의한 숲의 훼손이 심각하다라는 걸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 정관용> 한마디로 아까 표현하신 대로 원시림에 가깝던 곳이 이제는 농경지 위주로 변화하는.

    ◆ 김동진> 그렇죠.

    ◇ 정관용> 조선시대 500년 동안 그 사이에 인구도 급증하고. 그런데 그 급증한 인구들은 충분히 잘 먹고 살았다.

    ◆ 김동진> 그러니까 19세기까지는 상당한 수준에서 생활수준이 유지가 됐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외국인 기록 같은 것을 봐도 조선사람들의 특징이 밥 많이 먹는 거 힘 센 거 이런 것이죠. 그다음에 조선 사람들이 먹는 소고기, 소고기. 특이하게 맛있고. 세계에서 덩치가 가장 큰 소 중의 하나고. 이런 설명이 나오죠.

    ◇ 정관용> 외국인들의 관찰에서 그렇게 나오는군요.

    ◆ 김동진> 그렇습니다, 한국의 소가 세계에서 가장 큰 소였습니다.

    ◇ 정관용> 아까 김일성이 북한 정권 들어설 때 쌀밥에 고깃국 실컷 먹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고 했는데.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쌀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었군요.

    ◆ 김동진> 그렇죠, 그래서 아마 제가 보면 우리 주변에 있는 나무 중에서 이팝나무라는 게 있는데 그 나무의 유래를 보면 이성계가 이씨 왕조를 세우고 나서 우리가 쌀밥을 먹게 해 줘서 그 나무를 이밤나무라고 하는데 그걸 좀 세게 불러서 이팝나무라고 한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이 씨 왕조 내내 그 시기는 약간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국가로서는 백성을 배불리 먹이는 것을 국가의 목표로 삼은 나라니까요. 그러니까 어쨌든 배불리 먹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어느 정도 그런 수준이 유지가 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 정관용> 오늘 호랑이 그리고 소 이야기를 중심으로 실제 조선시대에 백성을 먹고 살게 하려고 어떤 생태변화가 일어났는지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동진> 감사합니다.

    ◇ 정관용> 교원대학교 김동진 교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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