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 (황진환 기자/자료사진)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방중 기간 내내 조용한 행보를 견지하면서 한국 정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틸러슨 장관의 방중이 중국의 계속되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조치를 해결하는데 실마리를 가져다 줄 것으로 희망했던 한국 정부는 틸러슨 장관이 한국을 방문한 17일 강도 높은 대중(對中) 발언을 쏟아내자 내심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 한국 방문 틸러슨 사드 보복조치 "부적절하고 유감" 중국에서는 침묵틸러슨 장관은 이날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의 공동 기자회에서 사드 보복 조치와 관련해 "중국이 반대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한국에 대한 경제적인 보복 조치는 부적절하고 유감스럽다"며 직접 중국을 겨냥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떤 지역의 큰 나라가, 다른 나라의 위협으로 자국을 방어하려는 것에 대해 이런 조치를 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고 거듭 사드보복을 비판했다.
한 외교부 당국자는 틸러슨 장관의 발언 수위가 한층 높아졌다고 평가하면서 “이런 기조를 미국 측에 잘 전달한다면 중국의 입장 변화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기대했다.
하지만 18일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과 함께 기자회견 장에 선 틸러슨의 입에서는 ‘사드’는 물론이고 중국에 대한 압박용 수단으로 여겨졌던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이라는 단어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왕 부장이 "중국 측은 이번 회담에서 대만 문제 그리고 한반도 사드 문제에 대한 원칙과 입장을 표명했다“고 밝히면서, 오히려 중국측이 사드 반대에 대해 공세적인 입장을 취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자회견 장에서 틸러슨 장관의 입장 발표 시간이 왕이 부장의 절반에 불과할 정도로 틸러슨 장관은 가급적 발언을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19일 있었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동에서도 사드와 북핵 문제는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 큰 소리치던 틸러슨 장관이 중국에서 정작 입을 다문 것에 어떤 외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틸러슨 장관이 중국측과 첫 만남이라는 점을 들어 서로 간의 입장차를 확인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4월 초 트럼프-시진핑 정상회담을 앞두고 가급적 감정적 대립을 피하기 위해 이번 회담에서는 논의하지 않거나 아니면 서로간의 입장차를 확인하는 선에서 그쳤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양국 정상회담을 앞두고 협상테이블에서 오갔던 민감한 대화를 기자회견장에서 다루지 말자는 것에 양측의 공감대가 맞아 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미국이 개입해도 사드 보복조치 장기화 불가피할 듯분명한 것은 이 장면이 중국의 사드 보복조치가 미국의 개입으로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이제 장기전까지 각오해야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이다.
사드 보복 문제는 다음 달로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 결과와 5월 9일로 예정된 한국의 대선결과가 모두 나와야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장기전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커졌다.
한국으로서는 사드보복 조치에 대한 대항마로 꺼낼 수 있는 카드를 모두 꺼내보였지만 별 소득이 없어 더욱 곤혹스런 처지에 빠질 수도 있게 됐다.
틸러슨 장관의 외교적 자질에 대한 회의론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 외교안보 전문매체 디플로매트의 앤킷 판다 선임에디터는 19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기고한 칼럼에서 틸러슨 장관의 초기 몇 주 동향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행정부의 전임자들에 비해 미국 외교정책 결정 절차에서 한계가 훨씬 크다는 것을 시사했다고 주장했다.
칼럼은 틸러슨 장관이 한국에서는 상대국을 안심시키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대북정책과 관련해 중국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지만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여전히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알려져 체면까지 구긴 점을 지적했다.
북한에 대한 군사적 대응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초강경 발언을 쏟아냈지만 북한이 곧바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신형 고출력 로켓엔진 지상분출시험에 이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예고해 틸러슨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외교가 일각에서는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권력교체 뒤로 중국의 북한에 대한 통제력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을 통한 북한 압박' 카드를 꺼내든 것 자체가 부적절한 선택이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반면 중국과 첫번째 회동이었지만 경색 국면으로 치닫던 미·중 관계를 어느 정도 복원하고 북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양국의 공통 인식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는 평도 나온다.
쑤샤오휘(蘇曉暉) 중국국제문제연구원 국제전략연구소 부소장은 북핵문제를 둘러싼 미중 양국의 협력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쑤 부소장은 우선 양측이 한반도의 고조된 긴장상황과 위험성을 공동으로 인식했다는 점을 거론하며 북핵문제에 대해 양국이 서로 협력할 여지는 여전히 크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