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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 한·일관계 불편? "불편하라고 세웠다"



강원

    평화의 소녀상, 한·일관계 불편? "불편하라고 세웠다"

    [인터뷰] 평화의 소녀상 김운성 작가

    - 목숨처럼 생각하는 창작표현의 자유, 가해 국가 일본은 무례!
    - 미안한 마음 덜기 위해 시작한 소녀상 제작, 전국 50여점
    - 잘린 머리, 들린 뒤꿈치, 빈 의자. 소녀상에 담긴 상징만 12가지.
    - 여성인권.세월호. 통일문제까지,문화예술 분야에서 꾸준히 다룰 것

    ■ 방송 : 강원CBS<시사포커스 박윤경입니다="">(최원순PD 13:30~14:00)
    ■ 진행 : 박윤경 ANN
    ■ 정리 : 홍수경 작가
    ■ 대담 : 김운성 조각가

     

    일제강점기, 어린 소녀들이 위안부로 유린당했던,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평화의 소녀상'. 평화를 꿈꾸는 시민들의 염원으로, 소녀상 건립을 추진하는 지역이 점차 늘고 있죠. 최근 그 움직임이 강원도에도 이어지고 있는데요. 목요초대석, 오늘은 평화의 소녀상 제작자죠,춘천 출신의 김운성 조각가 모시고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다음은 김운성 조각가와의 일문일답.

    ◇ 박윤경> 김운성 조각가님, 춘천 출신으로 소개를 해드렸다. 고향이 춘천이다.

    ◆ 김운성> 네, 태어나기는 홍천에서 태어났는데, 3살 때 춘천으로 와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 박윤경> 언제까지?

    ◆ 김운성> 현재도 부모님이 춘천에 계시고, 춘천국민학교부터 군대까지 춘천에 있었다.

    ◇ 박윤경> 춘천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있는지.

    ◆ 김운성> 소양강, 공지천, 삼천동의 기억도 있고, 또 하나는 그 중심에 미군부대가 있었고, 그 옆에 우리 집이 있었던 기억이다.

    ◇ 박윤경> 앞서 소개를 했듯이, '평화의 소녀상' 조작가로 알려져 있다.처음에 이런 의미있는 작업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 김운성> 2011년 1월 일본 대사관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날이 마침 수요일이었다. 몇몇 분이 집회를 하고 있더라. 그분들의 구호를 들어보고 자성이 됐다. 미안했다. 수요 집회를 처음 보게 된 것이었는데, 그간 한 번도 참여 못하기도 했고, '91년부터 세상이 떠들썩하게 시작된 집회가 20년 지났는데, 아직도 문제가 해결이 안됐구나… 그동안 나는 뭘했지?'라고 생각했다. 정대협에 찾아가서 "미술하는 사람인데, 미안한 마음을 덜 수 있는 일을 달라"라고 말했다. 마침 집회 20년째 되는 해에 1000회를 맞기도 했는데, 이를 기념해 작은 비석 세우고 싶다고, 디자인해달라고 하더라. 2011년 12월 14일 수요집회 1000회 되는 날이 제막식이었다.

    ◇ 박윤경> 정신대라고 한다면.

    ◆ 김운성>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 박윤경> 특히, 부인 김서경 조각가와 함께, 부부조각가로 작업을 하시는 걸로도 유명하지 않나. 부부의 뜻이 서로 맞기에 가능한 일일텐데.

    ◆ 김운성> 물론이다. 정대협에서 협의를 하고 와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김서경 씨도 고민을 쭉 같이 하게 됐다..

    ◇ 박윤경> 소녀상을 제작했을 때, 역할분담은.

    ◆ 김운성> 시작은 제가 했지만, 남성에게 당한 여성의 모습 아니겠나. 소녀상을 가만히 보면 여성의 손길이 있다. 여성의 감성을 가지고 사람과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 김서경 작가가 제작을 주도적으로 했다.

    ◇ 박윤경> 소녀상을 만들기까지… 수많은 고민이 있었다고 들었다. 어떤 에피소드가 있는지? 눈매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에도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고.

    ◆ 김운성> 눈 크기, 눈 사이사이 간격에 따라… 또 인중의 길이, 광골이 좁든가 넓든가에 따라 인상이 달라 보인다. 그 인상을 찾기 위해서 찰흙을 고치고 고치다가 어느 순간, 이거구나라고 하는 과정을 거쳤다.

    ◇ 박윤경>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만들었다… 소녀상 곳곳에 담긴 상징이 무려 12가지라고.

    <강원cbs시사포커스 박윤경입니다="">에 출연한 김운성 작가. (사진=강원CBS)

     

    ◆ 김운성> 소녀상의 머리가 처음에는 댕기머리로 하려고 했다. 그 당시 소녀들의 머리가 댕기머리였다. 그런데 거칠게 뜯겨진 형태의 단발로 제작했다. 머리카락을 인연의 상징으로 봤다. 왜냐면 중이 되기 위해서 절로 가기 위해서는 속세와 인연을 끊기 위해서 머리를 자른다. 전장에 나가는 장수도 자기 인연을 남기기 위해서 머리를 잘라놓고 전쟁터에 나가고, 그걸로 제사도 지내고 했다. 소녀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남에 의해서 끌려간 것이기에 끊겨진 인연을 표현한 상징으로 썼다. 발뒤꿈치가 들려져 있는 것은 여성들이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왔을 때, 처음에는 가족들이 울고 통곡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 안에서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픔을 당했지만 우리집에 없었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태도가 소녀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마을 어귀에서 살게 돼도 친인척들의 간섭으로 또 옆 마을로 떠나게 되고, 그러다보면 전혀 알 수 없는 곳에 갈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가족들과 편히 지내며 뒤꿈치를 디뎌야 하는 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을 표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2015년 12월 28일 굴욕적 합의로 뒤꿈치를 디딜 수 없는 그런 부분에 대한 표현을 한 것이다. 또, 옆에 보면 빈 의자가 있다. 2011년 12월14일 제막당시 56명의 할머니가 살아계셨다. 근데 1991년 김학선 할머님이 "나는 일본군 피해자"라고 얘기한 후 함께 등재하신 분 238명이었다. 그런 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56명이 남은 것이다. 그런 빈자리를 표현하는 동시에, 그 빈 자리에는 누군가가 앉아야한다는 것이다. 소녀의 마음도 헤아려주고 할머님이 싸우는 부분도 이해할. 또 의자에 앉으면 일본대사관이 보이는데 그 상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해야 할 자리이기도 하다.

    ◇ 박윤경> 소녀상 뒤에는 할머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그 이유는?

    ◆ 김운성> 끌려갈 당시에는 소녀였는데 91년도 싸움이 시작될 때는 할머니가 됐다. 45년 해방부터 91년까지, 46년의 기간동안,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욕을 먹었다. 더러운 년…창녀… 파편처럼 그런 이야기들이 쌓여져, 상처들이 온전히 남아있는 아픈 역사를 표현했다.

    ◇ 박윤경> 소녀상의 손이 처음에는 무릎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가 주먹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변화된 이유는?

    ◆ 김운성> 소녀상을 제작하는데 매스컴을 통해 일본의 끊임없는 반대가 표명됐다. 예술가들은 창작표현의 자유를 목숨처럼 생각한다. 창작도 안 된 것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것, 더구나 가해자 국가가 피해자 국가를 막는 일에 대해 엄청나게 무례하다 느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이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으로, '주먹을 쥐자. 이 작업을 온전히 잘 하자. 설치 후에도 이 일을 함께하자'는 의지를 보여주게 됐다.

    ◇ 박윤경> 자료를 많이 찾아보고 작업을 하셨을텐데, 위안부 할머니들과도 이야기를 좀 나눠봤나?

    ◆ 김운성> 할머니들을 보기는 했지만 이야기 나눌 용기가 들지 못했다. 자료를 찾아 보기만 해도 감정이입이 되면 주체하지 못한다. 작업하면서도 그 부분에 고민스럽고 힘들었다. 일본의 압력보다도 힘든 것이 작업 곳곳에 있었다.

    ◇ 박윤경> 평화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소녀상을 둘러싼 공격도 적지 않았다. 대전에서는 소녀상에 누군가가 일장기와 욱일기를 꽂고 사진을 찍는 일도 있었다… 그런 일 접할 때마다 어떤지.

    ◆ 김운성> 처음 있었던 일이, 일본대사관 앞에 말뚝박고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일본인의 행위였고, 미국에서는 친일적인 미국인이 조롱하는 일도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간혹 있었던 일들인데, 굉장히 마음이 안 좋고 속상하다. 한번은 누가 소녀상을 깨면 돈을 주겠다 해서 망치로 세 번을 내려치는 사건도 있었는데… 돈을 준다고 해서 했다는 모습이 안타깝고 왜 이런 일이 생기는 지 잘 모르겠다.

    ◇ 박윤경> 일부에서는 소녀상에 대한 비판도 있다. 연약한 소녀의 모습이 다양한 위안부 피해자의 이미지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어떻게 보나.

    ◆ 김운성> 맨 처음 비석을 하려하다가 제작되지도 않은 걸, 일본이 하지마라고 했었다. 정대협을 찾아가 "비석갖고는 일본을 혼내주지 못하겠다. 조각으로 멋지게 해보자"했더니 정대협에서 좋아했다. 그 때, 응징하고 타격하는 모습, 과격한 모습으로 조각을 구상했었다. 일본을 해하려는 모습 등… 그런 모습이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김서경 작가가 소녀상을 제안한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다른 게 있다. 나는 일본의 사죄를 정확히 받고 응징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김서경 작가가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사람의 동감을 받을 수 있겠나"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소녀상의 모습에도 단호하고 당당한 모습이 있다. 절대 슬퍼하는 모습만 있는 게 아니다. 과격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당당한 모습 내재돼 표현했고, 그랬기에 사람들에 동감을 받을 수 있었다.

    ◇ 박윤경> 또, 한일 감정 대립을 부추긴다… 일본을 자극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김운성>일본에 가서 강연을 했는데. 끝난 후 "왜 소녀상의 작가는 한일간의 외교마찰이 있을만한 작품을 일본대사관 앞에 세웠나. 이것은 일본 정치외교학과 대학생과 대학원생의 공통된 질문이다"라는 질문을 받았다. 말 끝에 불편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하기에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불편하라고 세웠다"라고 답했다. 전쟁범죄와 미성년을 성적노예로 삼은 범죄에 대해 사죄 한번 하지 않은 것은 당연히 반성해야 할 일인데, 불편해야지 떳떳하면 되겠나라고 말했고, 그 때 사람들이 박수를 많이 치더라.

    ◇ 박윤경> 여러 수난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소녀상 건립은 날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몇 군데나 설치돼 있나?

    ◆ 김운성> 50여군데 되는 것 같다.

    원주시청 공원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사진=강원CBS)

     

    ◇ 박윤경> 전국 별로 소녀상의 건립 추진위원회가 꾸려지고 또 건립이 이뤄지고 있다. 강원도의 경우, 최근 원주 강릉에 모여 춘천에도 설치 움직임이 일고 있지 않나.

    ◆ 김운성> 며칠 전에 대학생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 때 결의하는 자리였다.

    ◇ 박윤경> 소녀상 옆을 보면 마음을 보여준 분들의 이름이 새겨져있곤 하더라.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모금과 참여로 이뤄졌다는 게, 귀하게 여겨진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이 일을 처음 시작한 제작자로 느끼는 감회도 남다를 것 같다.

    ◆ 김운성> 그렇다. 이런 사례가 별로 없기 때문에, 더 감동적인 건, 사람들이 와서 자기의 이름을 살펴보면서 뿌듯한 감정을 느끼는 모습이다. 그런 마음으로 인해 소녀상의 의미가 점점 더 잘 전파되겠구나라는 마음을 가졌다.

    ◇ 박윤경> 해외에도 설치되고 있다. 얼마나 설치됐나?

    ◆ 김운성> 미국에 2군데, 캐나다, 호주, 중국, 독일에 하나씩 있다.

    ◇ 박윤경>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작품을 만들고, 작품을 통한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다.최근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을 만들기도 하셨다?

    ◆ 김운성> 김서경 작가와 제가 할머님들에게 드리는 선물이다. 어렸을 때 상처를 당했고 91년부터 싸움을 시작하게 되면서, 본인들이 치유가 되기도 한 것 같다. 완전하진 않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 할머님들의 직업이 여성인권운동가가 됐다. 그만큼 성장하신 거다. 그런 모습이 너무 존경스럽다. 이런 할머님들에게 선물을 드리자라고 생각했다. 곧 제막식을 할 것이다.

    ◇ 박윤경> 더 신경 많이 쓰였을 것 같다.

    ◆ 김운성> 살아계신 분들의 것이니까. 보통 돌아가시고 나서 하는데, 그게 무슨 소용 있겠나? 나는 이분들이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 분들이 살아계실 때, 선물을 드리고 싶었기에 신경 많이 썼다.

    ◇ 박윤경> 갚진 선물 될 것 같다.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으시다.최근 백남기 농민을 추모하기 위한 구조물을 만들기도 했다.

    ◆ 김운성> 백남기 선생의 경우 국민들이 TV로 직사 살수 당하는 모습을 봤는데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기록을 해야겠다 싶었다. 또, 베트남 피에타 상이라 해서..우리가 피해를 준 나라도 있는데.. 그 나라에 대한 사죄 반성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제작된 작품도 있다. 사과의 의미로 그냥 드리기로 했는데.. 아직 설치는 못했다. 세월호 관련 작품도 제작해서 전시를 계속하고 있다.

    ◇ 박윤경> 앞으로의 작품 활동도 기대가 된다. 어떤 계획 갖고 계신지.

    ◆ 김운성> 해야 되는 부분 너무 많다. 여성인권, 세월호 등 기억해야 하는 부분들을 어떻게 남겨야 하는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해야하는 부분을 고민할 것. 한국사에서 가장 큰 ‘통일’에 대해서도 문화예술이 해야할 역할 꾸준히 할 것이다.

    ◇박윤경>네. 오늘 귀한 시간 감사했습니다. 지금까지 '평화의 소녀상' 제작자 김운성 조각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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