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연애 유무로 어떤 사람의 상태를 '구분'한다. 누가 정했는지,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지만 여하튼 '연애 적령기'로 여겨지는 20~30대일 경우, '왜 연애를 안 하니?'라는 질문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창비학당과 한국여성의전화가 도대체 그놈의 '연애'란 무엇인지를,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살펴보는 '사랑에도 공부가 필요하다' 강의를 마련했다. '괜찮은' 연애를 하고 싶은 사람에서부터, 대안적 연애에 관심을 두는 사람까지 연애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다. 3월 24일부터 5주 동안 매주 금요일에 펼쳐질 이야기를 들어본다. 기사화를 반려한 2강 '이성애를 고민하다'(3/31)를 제외한 4편의 기사가 나갈 예정이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연애·결혼 중인데도 연인이 떠날까봐 불안하신가요?<계속>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다. 하는(Doing) 것이다'.
24일 열린 '사랑에도 공부가 필요하다'의 첫 강의 주제는 '정상성의 종말을 꿈꾸며: 삶, 관계, 사랑에 대한 새로운 감각 만들기'였다.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젠더센터 김순남 연구교수는 사랑은 '계속성'이 필요한 행위라는 데 방점을 찍었다.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사랑의 모습은 대개 낭만화되어 있다. 젊고 아름다운 두 남녀가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은 마치 영원할 것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사랑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은 가장 '위험할' 수 있다
(사진=스마트이미지)
김 교수는 우리가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모습에 가장 많은 의문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삶에서 발생하는 예측 불가능하고 불안한 상황을 두려워하거나 문제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혼란을 '성장의 시작'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근대의 삶의 핵심은 '동질성'이었다. 다 '때'였다. 때 되면 결혼하고 때 되면 아이 낳고…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시작번호가) 1이니까 거기에 맞는 방식으로 나의 욕망을 구성하고, 그래서 각각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로 자라난다. 동질성으로부터 일탈하는 것 자체가 공포로 자리잡은 것이다. 같은 행위를 해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자연스럽게, 혹은 낯설게 본다. 이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라며 "그러나 가장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그 관계에 가장 많은 질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과거 사랑의 방식은 '영원성'이었다.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은 곧 사랑이 확인이기도 했다. 결혼식에서 단골처럼 나오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반면, 최근에는 '비혼'(결혼하지 않는 것)과 '졸혼'(어느 시기까지 결혼생활을 이어간 후 '졸업'처럼 마치는 것)이라는 말이 비중있게 다뤄지기 시작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던 개념이 현실로 다가온 셈이다.
김 교수는 "사회적으로 어떤 관계가 영원히 갈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억압적인 것은 없다"며 "관계에서 만족하지 못하면 누구든 떠날 수 있다는 게 사회적으로 '정상'이 되었을 때 비로소 패러다임 자체가 바뀐다고 본다. (타인이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만) 그 관계에 충실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연인이 떠난다고 당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하지만 '영원성'을 미덕으로 보았던 과거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보니, '이별'은 대단히 엄중한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내가 별로인 사람이기 때문에 헤어짐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별할 때마다 그 탓을 스스로에게 돌리거나 이별 이후 내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내 자아 가치가 올라가고 헤어지면 떨어진다고 보는 건 현대의 생각이다. 내 사랑이 떠난다는 것이 자존감에 타격을 주는 사회가 지금의 모습"이라며 "내가 아무리 완벽하고 괜찮은 사람이어도 모든 인간은 나를 떠날 수 있다. (연애가 끝나면) 주변 시선에 따라 내 가치가 취약해진다고 하는 사회가 되면서, 이 사람이 나를 떠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강박'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남성 중심의 현대 사회에서는 (이별하면) 내 자존감 자체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헤어지고 나서 문제가 생긴다. 주로 남자 쪽에서. (과거 여자친구가) 새로운 남성을 사귀는 순간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며 "모든 인간은 자기 삶에서 '헤어짐'을 통제할 수 없다. 모든 관계에는 불화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가장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혼자 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가장 불행해진다. 이는 자기 자존감을 (연애 혹은 결혼이라는 관계에) 걸고 의존해 왔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사진=스마트이미지)
◇ 이성애 중심주의 연애의 핵심, '반쪽 찾기'의 함정김 교수는 '이성애 중심주의' 신화의 빈틈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이성애의 핵심은 '반쪽'이라는 신화다. 남녀 속성의 차이를 굉장히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오로지 관심이 여성인지 남성인지에만 있고, 거기에 맞는 옷차림, 태도, 역할 수행을 기대하는 것을 본질적이고 자연적이라고 믿는 프레임 자체가 '이성애 신화'를 공고화한다"고 밝혔다.
자신의 성별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그에 따른 역할을 하려는 것 역시 신화적일 수 있다는 진단이다. 남성이면 당연히 여성보다 겁 없고 용감해야 하고, 여성이면 보다 다소곳하고 도시락을 잘 싸야 한다 등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예로 들 수 있다.
김 교수는 "누군가로 인해 (나의) '반쪽'을 채우겠다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 (상대방에게) 얼마나 기대를 많이 한다는 것인가. 결과적으로 (온전한 하나가 되지 못한 채) 반쪽으로 살다 죽는 것"이라며 "(그러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환대하고 인간으로서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고 전했다.
◇ '남녀 한 쌍', 그 너머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아직도 '정상적'인 연애의 모델은 '남녀 한 쌍'이지만, 점차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1인 가구, 동거만 하는 커플, 친구들끼리 사는 셰어 하우스, 성소수자 커플 등이다.
'보스턴 결혼'도 한 예다. 여성을 좋아하는 성적 지향을 지닌 여성(레즈비언)이 아니어도 여성들끼리 동거하는 관계를 말한다.
김 교수는 "19세기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고 일하면서, 가부장제에 저항하며 지속적으로 관계 맺는 과정에서 나온 형태"라며 "이 관계를 통해서 동지애, 돌봄, 마음 맞는 이들끼리 나누는 연대감, 로맨스까지 이뤄져 왔다. 이 4가지가 관계맺기의, 사랑의 핵심인데 다른 건 빼놓고 로맨스만 생각한다"고 짚었다.
지난해 6월,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17회 퀴어문화축제'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이어, "1923년에 '동성연애'라는 개념이 신문에 나오는데, 이때 여성 간의 동성연애를 이성애를 위한 하나의 예비적인 과정으로 바라봤다. 동성에 대한 친밀함을 미성숙한 단계로 보고 (이성과의) 결혼이 있어야만 완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보스턴 결혼도 그렇고 이 당시 동성연애를 바라보는 시각도 그렇고 이성애 이외의 모든 관계를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포인트"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보다 다양한 형식으로 관계가 변하고 있는 만큼, '관계적 시민권'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계적 시민권은 말 그대로 누군가와 관계맺을 권리다. 또한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결혼제도 안에 편입돼서 영원히 부부생활을 유지하는 사이의 이성'이 아니라도, 자신의 '관계인'으로 둘 수 있는 제도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프랑스의 팍스법, 독일의 법 제도에서 빌려온 개념이 바로 '생활동반자법'이다. 내가 가장 믿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관계인'으로 두어, 의료결정뿐 아니라 재산권 등의 권리를 나누는 것"이라며 "하지만 심상정 의원 정도만이 관련 정책을 내놨을 뿐, 현재 대선 국면에서는 치열하게 논쟁되고 있지 않고 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연애와 사랑을 떠올릴 때 우리가 얼만큼 억압적인 방식으로 관계맺고 있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또, 연인뿐 아니라 타자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새로운 존중과 환대를 모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