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자료사진)
몰래 촬영한 성매매 영상을 빌미로 10대 여고생을 협박한 남성이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신상정보를 알아내 합의를 종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알고보니 피해자와 부모의 주민번호와 주소 등 구체적인 신상정보를 이 남성에게 넘긴 당사자가 다름아닌 법원이었던 것으로 CBS노컷뉴스 취재결과 확인됐다.
◇ 연락 끊었으나…"영상 있다"며 협박"학생이라고 하면 그렇게 함부로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이었는데…. 너무 무서워요. 정말 후회스럽고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요."상담센터를 찾은 한나(가명·당시 15세) 양이 밀려오는 후회와 수치심으로 고개를 떨구는 동안 매수남의 요구는 더욱 대담해졌다.
지난 2015년 10월 스마트폰 채팅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알게 된 한나 양을 만나 성매매한 회사원 이 모(38) 씨는 다음 날 해당 앱에 한나 양의 사진을 올렸다.
자신의 연락을 끊고 앱까지 삭제한 한나 양을 겨냥해 "고딩 (내가) 어떻게 하나 보자"라는 글도 함께 게시했다.
뒤늦게 게시물을 확인한 한나 양이 항의하자 이 씨는 "우리가 만났던 차량 블랙박스에 성관계 동영상이 있다. 빨리 올려야겠다"라며 "학교에 퍼지면 재밌겠다. (성관계를) 한 번 더 하게 해주면 지우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이 씨는 한나 양과 상담센터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 조사 결과 이 씨의 차량 블랙박스에는 모두 21명의 여성 사진이 있었고 이중 17명이 10대 청소년의 것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1심 판결문 화면 캡처)
지난해 3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심담 부장판사)는 협박 및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촬영) 혐의 등으로 이 씨에게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했다.
◇ 어느날 불쑥 찾아온 협박범이 씨는 곧바로 항소하는 한편 한나 양 측에 끊임없이 합의를 종용하고 심지어 협박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한나 양은 "자꾸 그 때 생각이 떠오른다.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며 거부했다.
합의가 좀처럼 이뤄지지 않자 이 씨 모친은 지난해 여름 한나 양의 집으로 불쑥 들이닥치기도 했다. 집주소는 이 씨 변호인이 갖고 있던 수사기록을 통해 엿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집에 혼자 있던 아버지는 이때까지 전후사정을 모르고 있다 별안간 아연실색했다. 한나 양은 피해사실을 부모에게 알리지 못하고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아 재판을 이어가던 상황이었다.
(사진=이 씨 변호인이 법원에 제출한 답변서 캡처)
이 씨 변호인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어떤 착오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집 주소를 알려준 적은 없다"고 발뺌했다. 다만 그러면서도 "가해자가 직접 수소문해 수사기록 일부를 알아내서 온 상태에서 변호인 입장에서는 추가 기록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 법원이 떼준 '인적사항 보정권고'로 신상정보 확인한나 양은 끝까지 합의를 거부했고 2심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합의12부(이원형 부장판사)도 항소를 기각해 지난해 형이 확정됐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며칠 뒤 집에 도착한 한 통의 서류를 집어 든 한나 양 어머니는 다시 한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해당 서류는 이 씨가 청구한 것인데 여기에 한나 양 실제이름과 주소, 주민등록번호까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부모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까지 기재됐다.
취재결과 한나 양의 신상정보는 이 씨가 법원에 공탁금을 맡기는 과정에서 새어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이 씨 측은 "합의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점을 재판부에 증명하기 위해 합의금을 법원에 공탁하려 했다.
그런데 공탁 과정에서 이 씨가 피해자를 명확히 특정하지 못하자 법원은 '인적사항 보정권고서'를 내려줬다. 이 씨 측은 이를 이용해 손쉽게 한나 양의 주민등록등본을 뗀 것으로 밝혀졌다. 법원이 신상을 넘겨준 셈이다.
일반적으로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 신상정보는 엄격하게 관리되지만, 해당 사건의 경우 혐의명이 '협박'으로 기재돼 이러한 정보가 쉽게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
법원 관계자는 "담당 공무원은 서류만 보고 결정하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규정이) 명문으로 이것은 된다 안 된다 정해져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변호인과 법원 모두 "규정을 어긴 부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인권단체 '십대여성인권센터'는 최근 "관련자를 문책하고 규정 자체를 시정하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대법원에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