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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보낸 3년, 진실을 밝히는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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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가 보낸 3년, 진실을 밝히는 기록들

    [세월호 3년의 기억 ⑤] 다큐 영화 3편으로 복기한 세월호의 '3년'

    깊게 팬 상처를 지닌 세월호가 참사 3주기를 앞두고서야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을 떠안은 세월호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새 국면도 열렸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더 나은 세상으로 이어질 기억과 성찰의 길을 CBS노컷뉴스가 짚어봤습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자식 잃은 부모 물어뜯는 저들은 누구인가
    ①-ⓑ 왜 우리는 한때 "세월호 지겹다" 외면했을까
    ② "우린 침묵하면 모두 함께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겪었다"
    ③ 세월호 3주기, 가요계는 여전히 잊지 않았다
    ④ 모든 탄압은 '세월호'로 통한다
    ⑤ 세월호가 보낸 3년, 진실을 밝히는 기록들
    <끝>

    원래 4월 16일은 공휴일이 별로 없는 4월의 어느 하루일 뿐이었다. 3년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2014년 4월 16일 '그 날',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침몰했다. 배 안에는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들과 각기 다른 사연을 갖고 있던 일반 승객들이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에 304명의 사람들은 배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우리는 차디찬 봄날의 바다에서, 그들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그리고 최초 구조부터 유가족들의 투쟁까지, 꾸준히 세월호의 순간을 기록한 이들이 있었다. 영화 '다이빙벨'·'나쁜 나라'·'업사이드 다운', 세 편의 다큐멘터리는 곧 세월호 비극의 기록이었다. 배급사인 시네마달과 제작사들은 박근혜 정부의 압박과 자금 부족에도 끝내 영화 개봉의 뜻을 꺾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오늘, 뭍으로 올라 온 세월호를 본다. 찢기고 부식돼 과거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그 몸통을. 돌아오지 못한 9명의 실종자들과 아직도 선명히 보이지 않는 '그 날'의 진실을.

    이들 다큐멘터리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세월호 3년의 시간을 되새겨봤다.

    ◇ '다이빙벨', 세월호 구조의 기록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 스틸컷.

     

    세월호 구조·수색 작업이 한창이던 4월 21일 새벽 알파잠수기술공사 이종인 대표의 '다이빙벨'이 전라남도 진도군 팽목항에 도착한다. 이 대표는 이를 위해 1억 원 가량의 자비를 들였다. 전국에 단 하나 있는 '다이빙벨'은 잠수사의 잠수 시간을 크게 늘려주는 잠수 기구 중 하나다.

    가족들은 지지부진한 구조·수색 작업에 피가 말라갔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다이빙벨'은 아이들을 하루 빨리 찾아낼 수 있는 희망이었다. 1차 투입 시도, 해경의 진입 금지 조치에 '다이빙벨'은 하염없이 기다리다 철수된다. 이후에도 작업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해경청장과 해수부장관은 가족들의 요구에 '다이빙벨' 재투입과 협조를 약속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 스틸컷.

     

    돌아온 '다이빙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해경의 원인 모를 방해 공작이었다. 해경은 기존 바지선과의 충돌 위험 등을 이유로 '다이빙벨'이 실린 바지선의 접안을 거부한다. 2차 투입도 그렇게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3차 투입이 이뤄졌다. 이 날은 방송·신문 기자들도 투입 현장을 보기 위해 함께 승선했다. 해경이 문제라고 지적했던 바지선 접안은 5분 만에 끝이 났고,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다이빙벨'의 산소공급선이 누군가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처럼 잘려 있었던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 스틸컷 속 이종인 대표와 이상호 기자.

     

    산소공급선을 보수하는 사이, 이미 언론 매체에서는 '다이빙벨'이 실패라는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이빙벨'은 한 번도 바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바다에 들어가 선내 진입을 시도한 '다이빙벨'은 2시간 가량의 잠수 기록을 세웠다. 아무리 길어도 30분이 한계인 잠수사들의 기록을 생각하면 훨씬 작업 부담을 덜어주는 결과였다.

    의뭉스러운 일들은 계속 일어났다. 잠수사들이 감압하고 있는 시각, 해경 고속정이 사전통보도 없이 '다이빙벨'을 향해 돌진해 온 것이다. 작업 중인 잠수사들의 목숨까지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이빙벨' 재투입을 준비하고 있었던 이종인 대표에게는 해군 준장이 찾아와 철수를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이 대표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결국 철수 요구를 받아들인다.

    떠나기 전, 이 대표는 눈물과 함께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다. "이걸 막는 사람이 양심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그러면 안돼요."

    ◇ '나쁜 나라', 세월호 유가족 투쟁의 기록

    다큐멘터리 영화 '나쁜 나라' 스틸컷.

     

    세월호 사고 50일 후인 6월 4일, 국정조사위원회가 팽목항을 찾는다. 세월호 가족 간담회가 열리고, 세월호 가족들은 가족 참여를 조건으로 한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구한다. 여야 대립 때문에 제대로 된 국정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국정조사위원회는 이 요청을 수락하지 않는다. 지난한 투쟁의시작이었다.

    결국 국회 세월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서조차 사건 초기 오보와 미비한 구조의 진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가족들에게는 1분 1초가 슬픔이고, 지옥이었다. 가족대책위원회는 독립성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자고 뜻을 모았다.

    다큐멘터리 영화 '나쁜 나라' 스틸컷.

     

    임시국회는 폐회되고, 특별법 제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참사 88일 째, 유가족들은 국회에 배수의 진을 쳤다. 국회 앞, 차가운 돌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서로 손을 맞잡았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안산에서 서울까지 100리 행진을 하고, 광화문 한 켠에서는 목숨을 건 단식이 시작됐다. 유민 아버지 김영오 씨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할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청와대로 향한다. "언제든 찾아오라"는 박 대통령의 말과는 달리, 청와대의 문은 굳게 잠겨 열리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러나 세월호를 향한 정부의 냉대와 무관심은 살을 에듯 차가웠다.

    다큐멘터리 영화 '나쁜 나라' 스틸컷.

     

    세월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활동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종료됐다. 유가족들은 또 다시 거리로 나섰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찬성하는 국민 서명을 청와대에 전달하기 위해 '삼보일배' 행진을 계속했다. 집에 가면 아이를 그리며 눈물 쏟고, 다시 거리로 나서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여야는 유가족들의 요구와 달리, 수사권과 기소권이 배제된 특별법을 합의해 국회에서 통과시킨다. 기다렸다는 듯이 정부에서는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시행령을 발표한다. 유가족들은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 삭발식을 거행한다. 침통한 얼굴을 한 부모가 이야기한다. "이제는 이 나라가 싫습니다."

    ◇ '업사이드 다운', 세월호 그 이후의 기록

    다큐멘터리 영화 '업사이드 다운' 스틸컷.

     

    참사는 일어났다. 그러면 이제 우리 사회는 또 다른 비극을 막기 위해 무엇이 달라져야 하나. 세월호 이후, 드러난 한국 사회의 민낯을 전문가들이 진단한다.

    첫 번째, 세월호 침몰의 원인. 전문가들은 개조돼 안정성이 떨어진 선체와 관행적으로 행해져 오던 과적을 그 이유로 꼽는다. 원래대로라면 '평형수'를 충분히 채워넣어야 하지만 이렇게 하면 배가 가라앉기 때문에 승객과 화물을 더 싣기 위해 '평형수'를 뺐다는 것이다. 평형수가 모자랐던 세월호는 선체가 기울어진 순간, 복원이 불가능했다.

    카이스트에서 진행한 세월호 침몰 모의실험. (사진=유튜브 영상 캡처)

     

    "아마 이랬을 것 같아요. 규정보다 더 실어도 어제도 그저께도 괜찮았으니까. 반복해왔는데 문제가 없으면 확신을 갖게 되죠. 그런 게 우리 사회에 많습니다." (정현 한국과학기술원 조교수)

    직원 중 60% 가량이 비정규직이었던 것도 참사와 무관하지 않았다. 분명히 내부 직원들은 세월호가 보여준 위험 신호를 감지했겠지만 회사의 이윤을 침해할까봐 말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고 발생 직후, 세월호 선장은 청해진 해운 측과 통화를 하며 승객 구조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과적 책임 회피 방법이나 보험 등의 이야기를 나눴다.

    컨트롤타워의 부재는 또 다른 참사를 야기했다. 순환보직체제가 일반적인 행정부는 전문가를 키우는 시스템이 아니다. 이 때문에 관련 부서에도 재난 상황을 경험한 인물이 없고, 그러한 인물이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업사이드 다운'에 출연한 조 버간티노 뉴잉글랜드 탐사저널리즘 센터장.

     

    언론은 정부의 발표에 휘둘리면서 오보를 남발했다. 주류 언론사 중 진정성 있게 세월호 참사에 접근한 언론사는 극소수였다. 대다수 언론사들은 세월호 참사를 이용해 이슈 만들기에 힘썼다. 언론은 더 이상 진실의 가치를 수호하지 않았다. 감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하고,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 움직일 뿐이었다.

    다각도로 살펴본 원인 속에는 '정의롭지 못한' 한국 사회의 모습이 있었다.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가 공명정대하다는 믿음이 없다면 모든 자원의 분배가 망가진다고 이야기한다. 누구나 원칙을 지키면 손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업사이드 다운' 스틸컷.

     

    세월호 참사가 남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진실'로의 접근이다. 인간은 타성에 젖을 수밖에 없다는 공정식 코바 범죄연구소 소장의 인터뷰는 오싹함을 남긴다.

    "이제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거죠. 아마 세월호 사고보다 더 커야 관심을 갖게 될 겁니다. 이런 사건이 생겼을 때 확실히 변화시키지 않으면 결국 (사회는) 똑같죠. 불신과 안전불감증 모두 심화되리라 봅니다. 경제적 논리로 세월호 참사를 비난하는 사람들, 그런 방식으로는 앞으로 이런 문제는 해결이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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