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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희망에 울고 소망했죠" 수습기자 3인이 본 '세월호'



사건/사고

    "슬픔·희망에 울고 소망했죠" 수습기자 3인이 본 '세월호'

    • 2017-04-21 05:00
    (사진=박요진 수습기자)

     

    정식 기자가 되기 전 교육 단계인 수습기자들이 세월호 인양 단계에서부터 현장에 투입됐다. 작업 진행 과정부터 미수습자, 유가족들의 인터뷰까지 동분서주했던 그들의 뒷 이야기를 취재일기 형식으로 정리했다. 기사로 다 옮길 수 없었던 이야기, 그 슬픔과 희망에 함께 울고 소망했던 수습기자 세 명의 진심이 담겼다.

    ◇ 박요진 수습기자의 취재일기: 미수습자 텐트 설치를 돕는데 마음이 편해졌다

    (사진=박요진 수습기자)

     

    2014년 4월 16일 밤 9시쯤 선수 바닥 일부만 드러낸 세월호를 직접 눈으로 봤다. 전남 진도 서망항에서 출발해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탄 낚싯배 위에서였다.

    정부 발표와 달리 세월호 침몰 현장에서 구조작업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충분히 문제 삼지 않고 넘겼다. 강한 조류 때문에 구조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다는 발표를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3년 가까이 지나 세월호 인양 소식을 듣고 다시 진도로 향했다. 지난달 22일 오전이다. 팽목항에서 미수습자 가족들을 만났다. 희생자 가족으로 불리던 이들은 이제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왜 내 가족이 목숨을 잃었어야 하는지'를 물었던 이들은 '왜 내 가족이 아직도 세월호 안에 있어야 하는지'를 덧붙여 묻고 있었다.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에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사진=박요진 수습기자)

     

    그렇게 그들의 옆에서 3주 동안 시간을 보냈다. 내가 어느 회사 기자인지, 이름은 정확히 몰랐지만 적어도 명함은 다시 건넬 필요가 없는 사이가 됐다. 18일 오후 가족들과 자원봉사자들은 목포시에서 준비한 몽골식 텐트를 펴고 바닥에 깔개를 설치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쉬거나 손님이 왔을 때 머물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잠깐 고민하다 가방부터 내려놓고 일을 돕기 시작했다. 더운 날씨 탓에 이마에서 흐른 땀이 안경 렌즈를 가렸지만 마음은 묘하게 편해졌다. 진도, 목포에 내려온 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 처음으로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3년 전 기억 때문인지 내게 세월호 참사는 선을 그어놓고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다시 선배들을 도와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이런저런 기사를 취재하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대상이었다.

    (사진=박요진 수습기자)

     

    텐트 정리 작업을 마무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신항 안에서 나오는 단원고 미수습자 다윤이 어머니 박은미 씨를 만났다. 어머니에게 다가가 어제 보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친구 신청을 받아달라고 말했다. 가족들에게 취재를 목적으로 던지지 않은 첫 번째 질문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는 "그렇지 않아도 너와 닮은 사람이 친구신청을 해서 수락했다"고 말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SNS를 확인했지만 아쉽게도 어머니의 말은 절반만 진실이었다. 나와 닮은 누군가를 나로 착각해 친구신청을 수락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휴대전화를 건네받아 내 이름을 찾아 친구 수락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세월호 참사는 내 친구의 일, 곧 나의 일이 됐다. 3년이 걸렸다. 9명의 미수습자 수습과 진상규명이 완료돼 3년간 지속된 가족들의 2014년 4월 16일이 마무리되길 바란다.

    ◇ 김동빈 수습기자의 취재일기: 미수습자 가족과 유가족 사이, '수습' 통해 수습되길"

    (사진=김동빈 수습기자)

     

    목포신항에는 유가족들과 미수습자들이 쓰는 컨테이너 숙소들이 도로변에 일렬로 나열돼 있다. 컨테이너 사무실들은 옆으로 뉘인 세월호를 먼 발치서 볼 수 있게 놓였다. 이 중엔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의 숙소로 쓰이는 곳이 있다.

    두 컨테이너는 50m가 넘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컨테이너 사무실 행렬의 양 끝이었다. 목포신항에서 지낸 10일 동안 처음엔 단순히 공간적인 것인 줄 알았던 두 가족의 거리는 마음의 거리이기도 했다. 미수습자 가족과 유가족 숙소 사이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었다.

    경계를 넘어 다닐 때마다 '미수습자 가족'과 '유가족'이란 표현을 헛갈리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인터뷰 도중 말이 헛나가 고치기도 했다. 허다윤 양의 어머니 박은미 씨는 '유가족'이란 표현에 민감했다.

    '유가족'이라 자신을 부르는 사람에게 그 단어를 그 자리에서 바로잡곤 했다. "유가족이 아니라 유가족이 되고픈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이유로 목포신항에서는 세월호 3주기 추모 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대신 미수습자 수습기원을 위한 대회나 미사가 열렸을 뿐이었다.

    (사진=김동빈 수습기자)

     

    18일부터 시작된 세월호 객실부 수색작업은 미수습자 가족과 유가족 사이에 또 하나의 경계를 만들었다. 유류품에 대한 태도 차이였다.

    故구보현 양의 어머니 김경애 씨는 "유류품을 받고 싶지만 미수습자 가족을 생각해서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펄 속에서 발견된 옷가지 하나, 핸드폰 하나에 유가족 정성욱 씨는 밥을 먹다가도 항구로 뛰어들어가기 일쑤였다.

    유류품은 그만큼 소중했다. 하지만 미수습자 컨테이너로 경계를 넘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미수습자 권혁규 군의 큰 아버지 권오복 씨는 내부 수색이 시작 돼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유류품에 불만을 토로했다. "유류품이 나올 때마다 수색을 멈추면 수습은 언제 하느냐"는 것이었다.

    19일 서울로 떠나오기 전 세월호의 선체를 꽤나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녹슬어 버린 세월호는 군데군데 종이짝처럼 찢기거나 구겨져 있었다. 땅과 닿아있는 선수좌현 쪽에는 큰 구멍하나가 보였다.

    그리로 작업자들이 쉴 새 없이 들락날락했다. 손에는 펄이 잔뜩 묻은 유류품들이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유류품 끝엔 미수습자도 나오지 않을까란 희망을 품었다. 유류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날 아침에도 휴대폰이 발견됐다.

    다윤 양 어머니 박은미 씨는 "실종자 가족이 아니라 9명 다 찾아서 유가족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체 내부 수습작업의 시작은 단순히 몇 개의 구멍을 어디다 뚫는 문제가 아니었다. 미수습자 가족들을 유가족에게 돌려보내는 작업의 시작이었다. 또 미수습자 가족과 유가족의 경계를 없애는 작업의 시작이기도 했다.

    ◇ 정석호 수습기자의 취재일기: 가족들의 절절한 목소리에 힘을 싣고 싶었다

    (사진=정석호 수습기자)

     

    찢기고 녹슨 상처투성이. 19일 거치가 완료된 세월호를 가까이서 볼 때 받았던 인상이었다. 취재단에게 허락된 30m 남짓 거리에서 본 선체는 곳곳이 허물고 부식돼 있었다. 선수 인양 과정에서 생긴 와이어 자국이 할퀸 상처처럼 깊게 패어 있었고 선미 쪽은 아예 허물어져 원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지난 3년간 바닷속에 잠겨있던 세월호는 옆으로 누운 채 작업자가 드나드는 구멍을 통해 펄을 게워내고 있었다. 엉망진창인 세월호를 바라보는 건 버거운 일이었다. 정부의 구조 실패, '기레기' 언론의 취재 경쟁 등 대한민국의 민낯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듯했다.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잃은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들에게는 더욱 그랬을 터였다. 열흘간 기자가 만난 가족들은 매일매일 힘든 시간과 싸우고 있었다. 건우 아버지 김광배 씨는 '사랑하는 아이들의 삶이 저기서 마무리됐구나' 하는 생각을 배를 볼 때마다 수시로 한다고 했다. 미수습자 가족은 더 절박하다.

    다윤이 어머니 박은미 씨는 사고 이후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하루가 2014년 4월 16일에 멈춰있다. '피가 마르고 심장이 녹는' 심정에 직접 선체를 수색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했다.

    (사진=정석호 수습기자)

     

    기자로서 가족들의 심정을 취재하는 일은 막막하기만 했다. 이들의 감정에 공감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은 헤아리기에는 너무나 거대했다. 짐짓 슬퍼하는 표정을 짓다가도 녹음기를 쥔 손이 머쓱해 괜히 혼자 당황하기도 했다. 질문을 던지는 과정도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와 같았다.

    혹여나 감정을 건드려 폭발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했고 단어들을 하나씩 더듬거리며 질문해야 했다. 말 한 번을 잘못하면 그동안 쌓은 신뢰가 무너질 것 같아 불안했다.

    (사진=정석호 수습기자)

     

    한 번은 미수습자 가족과 이야기할 때 실수로 '추모'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가 불호령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 추모는 미수습자들이 가족 품으로 다 돌아온 후에 한다는 점을 헤아리지 못했던 탓이었다.

    언론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 친해진 것 같아 취재를 위한 질문을 슬쩍 던지면 "우리가 기자들 기사 쓰기 위한 인질이냐"라는 볼멘소리가 돌아오기 십상이었다.

    (사진=정석호 수습기자)

     

    선배의 조언에 따라 당분간 취재를 위한 질문은 되도록 하지 않기로 했다. 질문은 줄이고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렸다. 시시콜콜한 농담을 나눴고 맛있는 빵을 사면 같이 나눠먹었다. 텐트를 수리하는 작업을 하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일주일쯤 지나자 훨씬 더 편한 사이가 됐다.

    (사진=박요진 수습기자)

     

    그리고 세월호 3주기인 16일, 바쁜 날임에도 박은미 씨가 꽤 긴 시간을 할애해 주어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인터뷰에 많은 공을 들였던 것은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판에 박힌 이야기들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미수습자 가족의 말은 꼭 생생한 것으로 썼으면 했다. 한번 읽고 끝나는 기사가 아니라 이들의 절절한 목소리가 수습에 힘을 실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목포신항에 있었던 10일이 미수습자의 수습에 도움이 됐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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