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국여성민우회 제공)
"여성 배우들이 성적 수치심을 느끼더라도, 당연히 촬영을 거부하기 힘들죠. 그걸 마치 배우의 미덕인양 들먹이니까요."
17년 동안 연기를 해 온 배우 김꽃비의 이야기다.
그의 말대로다. 누군가는 배우를 촬영 현장의 '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톱스타들 몇 명을 제외하면 이들은 언제나 현장에서 습관적인 성희롱과 성추행에 시달려야 했다. 활동의 부익부 빈익빈이 극심한 연예계 현실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상하 권력관계 자체가 약점이 돼버리기 때문.
김꽃비는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STOP_연예계_내_성폭력' 토론회에서 한국 여성 배우들의 적나라한 현실을 고발했다.
"만약 현장에서 갑자기 합의되지 않은 노출 장면을 찍어야 한다면? 거부하기 힘듭니다. 시간이 곧 돈인 현장에서 그걸 거부했을 때 감당할 수가 없는 거죠. 심지어 배우라면 그런 걸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합니다. 한 사람만 참으면 되는 일이니, 결국 그 사람이 약자가 되는 겁니다. 가장 약한 사람을 착취하는 거죠."
남성 스태프들은 '성희롱'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행동들을 자연스럽게 한다. 카메라에 담긴 여성 배우의 신체 부위를 관음하며 성적 대상화를 서슴지 않는다.
"카메라로 배우의 특정 부위를 확대해 보면서 희롱을 하는 경우도 많죠. 앞에서는 물론 아니지만 뒤에서요. 그런 일이 꽤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마 당사자들은 성희롱이라는 인식도 없을 겁니다. 대놓고 그런 행동을 하기도 하니까요."
한국여성민우회는 성적 모욕을 당하면서 영화 촬영에 임했던 한 배우의 이야기를 공개했다. 여성 배우들의 인권은 대체로 현장의 자본과 효율 논리 속에서 짓밟혀 왔다.
"촬영 현장에서 남성 배우의 성기를 잡게 하고, 감정을 잡게 한다고 뺨을 때리기도 했죠. 심지어 이 배우는 감독과 남성 배우, 세 사람이 함께 잠자리를 가지자는 제안까지 받았어요. 문제는 계약서조차 없었다는 거였죠. 계속 감독에게 요구했지만 감독은 프로듀서에게 떠넘기고 그러다보니 계약서 없이 가게 된 겁니다. 문제 제기를 한 후, 촬영을 못하게 됐는데 출연료를 한 푼도 못 받았어요."
이윤정 영화 감독에 따르면 업계보다 진보적이어야 할 대학은 여전히 관습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문제를 제기하면 평판에 문제가 생긴다"는 명제는 성범죄에 노출되는 여성 배우들을 더욱 위축시킨다.
"영화계 내 여성 평판에 대한 공포가 실제보다 너무 큽니다. 대학교 영화학과 내 문화 영향을 많이 받아요. 영화 현장보다 대학교가 훨씬 더 20~30년 전 생각에 머물러 있습니다. 영화학과 안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이런 담론들이 계속 생산되고 있죠. 현장 영화인들과 현실 인식이 굉장히 달라서 당황스러워요. 이런 생각은 여성 배우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의지를 꺾습니다."
◇ 성범죄에 신음하는 연예계 속 여성들이는 비단 여성 배우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소위 '막내'로 불리는 여성 스태프들 역시 공개적인 성희롱과 성추행을 감내한다. 배우 김꽃비가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바로는 그렇다.
"배우는 그래도 나름대로 어렵게 대할 수도 있어요. 물론 나이 많은 남성 배우나 감독이 권력이 있다면 얘기는 또 다르죠. 의상팀이나 분장팀에 여성 스태프들이 많아요.
이들은 언어적으로 많이 희롱당합니다. 억지로 술자리 따라가는 일도 다반사고요. 촬영을 하면 숙소 생활을 많이 하는데 밀폐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그런 성범죄도 많습니다."
배우나 가수 지망생인 여성들에게는 더 가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밝힌 몇 가지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 데뷔 음반을 발매한 가수 A 씨는 어느 날 소속사 대표로부터 중소기업 유지를 소개받았다. 대표는 "네가 가서 돈을 벌어오라"며 성매매를 강요했고, 이에 A 씨는 계약 해지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소속사는 트레이닝 비용과 음반 발매 비용 등 총 2억 원에 달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 아이돌 가수의 꿈을 키우던 B(19) 양은 길거리 캐스팅으로 소속사에 입성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속사 실장이 "가수를 하기 위해서는 네 몸이 얼마나 예쁜지 봐야겠다"며 누드 사진을 찍으라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는 거절하는 B 양을 계속 설득하면서 이런 사진을 찍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고, 이미 많은 인기 연예인들이 누드 사진을 찍으면서 활동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네가 나중에 회사를 등질 경우를 대비해 '볼모성' 자료가 필요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집요한 설득 끝에 시작된 촬영. B 양은 계속 몸이 만져지는 추행을 당해야 했다.
◇ 연예계 내 성폭력 근절? 제도 개선이 최우선연예계 내 성범죄 대부분은 권력·위계 구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렇다면 해법은 제도 개선을 통해 사법적 정의를 구현하는 것 뿐이다. 개인의 도덕성에 기대하기 보다는 구조적 문제로 접근, 엄격한 규제와 처벌로 맞서야 한다.
이윤정 감독은 "어쨌든 영화계가 평판이 예민한 조직인 것은 맞다. 그런데 이런 가해자들이 법적으로 책임지거나 경력이 단절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결국 이 때문에 피해자 여성들은 2차 피해를 입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영화계 내부에 성범죄를 감시하는 공적 조사 기구가 필요하다. 사실 인식은 많이 달라졌다. 관행이 그렇다는 것은 가해자들의 핑계지만 이를 증명하기가 어렵다. 사건 발생에서 사법적 정의로 가기까지 어렵기 때문에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중간 기구가 필요하다"고 궁극적인 해결 방안을 제안했다.
성범죄에 대한 책임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있다. 이 당연한 책임 의식이 영화계에도 심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감독은 "현장 불편이 발생한 것은 피해자 신고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가 그런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또 현장 관리에 책임이 있는 주체들이 이를 방관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견디다 못해 말하기 전에 공적 조사 기구에서 먼저 피해자를 파악하고 질문을 던졌으면 한다. 그런 제도적 시스템이 현장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꽃비는 제도와 인식의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희롱 예방 교육을 넘어서는 캠페인 급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인식이 제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규제나 처벌이 우선시된다면 거센 반발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인들이 어떤 것이 성폭력이고 성추행이고 성희롱인지 인식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밖에 성폭력 사건을 기록한 '백서' 발간, 세부 내용까지 철저히 합의하는 계약서 문화의 정착, 매니지먼트 회사 설립을 허가제로 변경, 여성 연예인들끼리의 연대 등 다양한 해결책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