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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초현실주의 전시, 한국 민중미술 보는 느낌



공연/전시

    이집트 초현실주의 전시, 한국 민중미술 보는 느낌

    '예술이 자유가 될때: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1938-1965)' 전시, 덕수궁미술관

    압둘하디 알자제르, 시민합창단, 1951, 나무에 유채, 47.5x67.5cm, 카이로이집트근대미술관 소장.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은 사회 저항적 주제와 결합했다. 이러한 작품으로 압둘하디 알자제르의 <시민 합창단="">(1951, 바로 위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본래 1948년에 그려졌는데, 이 그림으로 알자제르가 구금되면서 작품은 유실되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은 원본을 바탕으로 1951년에 다시 그려진 것이다. <시민 합창단="">은 빈 식기, 사발, 항아리를 발아래에 놓고 한 줄로 서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원시주의 양식을 사용하여 다양한 형상을 통해 카이로의 빈민들과 재산을 몰수당한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초기 민족주의 회화와는 달리 <시민 합창단="">은 이집트의 거대한 역사나 귀족층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이집트의 혼란한 현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집트 근현대시기 미술을 다룬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1938-1965)' 전시 작품 경향 중에는 한국 민중미술과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 주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한국 민중미술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등장했다. 그 전에 한국의 저항미술은 월북 작가 이쾌대의 1940년대 중후반 작품 '군상' 시리즈가 독보적으로 인식될 뿐, 1950-1970년대 한국에 미술로서의 사회 비판은 암흑기였다. 이와 달리 이집트에서는 한국보다 반세기 빠른 시점에 사회 저항미술이 점화되어 4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했다.

    왜 두 나라의 저항미술 발흥 시점이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그건 역사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술을 비롯한 예술은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다. 이집트는 1차 세계대전 종료 후인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한국은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하였다.

    독립 이후에도 두 나라의 정치 상황은 대별된다. 이집트는 1952년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외세의존적인 왕정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는다. 나세르는 '제국주의 타도, 봉건 제도 타도, 사회주의 실현'을 내걸고 왕정 폐지, 공화정 수립 등의 정치 개혁과 동시에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는 1956년에 대통령에 당선된다. 반면 한국은 해방 후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강권 통치 아래 놓이게 된다.

    '예술이 자유가 될때: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28일 개막했다. 이 전시는 한국처럼 식민지 시기를 거친 이집트가 미술을 통해 근대성을 어떤 표현 방식으로 구현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전시에는 회화, 사진, 조각, 드로잉 등 166점이 선보인다.

    바로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근대성, 근현대 미술은 서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근대성을 보다 다양하고 신비롭고, 때로는 모순적인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마리 관장은 이어 "이번 전시는 20세기 초 서구를 넘어 예술의 자유를 확산시키고, 그 자유를 얻고 근대를 이룩하는 수단으로서의 예술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공동 기획한 이집트 사르자 미술재단의 후어알 카시미 감독은 "이집트 초현실주의 미술은 시대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예술 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전시는 서구열강의 시각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기획됐다"고 밝혔다.

    이 전시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뉘어진다. 1938-1945년, 그리고 1946-1965년. 이 두 시기구분은 이집트 초현실주의 미술을 이끌었던 두 단체의 활동 기간을 고려했다. 전반기를 이끌었던 단체는 1939년에 탄생한 '예술과 자유 그룹', 후반기를 이끌었던 단체는 1946년에 설립된 '현대미술그룹'이다.

    이집트 초현실주의와 유럽 초현실주의 관계, 그리고 이집트 초현실주의의 독자성과 그 사회적 맥락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개별 작품들을 먼저 살펴보자.

    인지 아플라툰, 딘샤와이 학살, 1950년대, 종이에 잉크, 63.5x49.3cm, 바리질미술재단 소장.

     

    <딘샤와이 학살="">(인지 아플라툰 그림, 1950년대, 바로 위 작품)은 1906년 식민종주국 영국군에 의해 이집트 딘샤와이 마을 농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다룬 그림이다. 농민들에게 가축과도 같은 식용 집비둘기를 영국군이 사냥하자, 이에 분노한 농민들이 영국군의 총을 빼앗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영국군이 총을 발사해 아낙 한명이 치명상을 입었고 4명이 총에 맞았다. 포위된 영국군 중 한 명이 탈출했다가 일사병으로 죽자, 영국군은 이집트 민족주의들의 사주를 받은 농민들의 적대 행위로 간주한다. 마을 주민 52명을 체포해 4명은 교수형, 나머지는 종신형, 7년형, 채찍질형을 선고한다. 교수형과 채찍질형은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집행했다.

    카밀 알텔미사니, 무제(앉아있는 누드), 1941, 캔버스에 유채, 73x58cm, 카이로이집트근대미술관 소장.

     

    <무제(앉아 있는누드)="">(카밀 알텔미사니 그림, 1941, 바로 위 작품)은 벌거벗은 여성의 자궁에 쇠말뚝이 박혀,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을 그렸다. 이 작품은 당시 이집트의 반식민지적 상황을 은유한다. 1922년 이집트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푸아드 국왕 중심으로 한 왕정체제를 유지했지만 이집트의 독립 진정한 의미의 독립은 아니었으며, 정권을 잡은 푸아드 국왕은 영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20세기 중반까지 이집트를 점령했던 영국은 이집트 지배 계층과 협력하여 서민들을 착취했다. 빈부격차는 갈수록 커졌으며 빈민가에는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 범죄가 만연하였다. 지배계층은 독립 후에도 여전히 기존의 식민지배 방식으로 민중을 지배하려 했고, 이러한 이유로 자연스럽게 중산층과 농민들의 사회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압둘하디 알자제르, 평화, 1965, 나무판에 유채, 80x170cm, 카이로이집트근대미술관 소장.

     

    앞의 <시민 합창단=""> (1951)을 그린 알둘하디 알제자르는 나세르 집권 후인 1960년대에 국가의 국가의 부흥을 바라는 작품들을 그린다. 1962년 작품 <헌정>, 1965년 작품 <평화, 바로="" 위="" 작품="">가 그것이다. <헌정>은 이집트 문장을 머리에 쓴 인물을 중심으로 좌우에 인물을 배치했다. 좌측은 공구를 든 인물, 우측은 목화솜과 곡식알을 든 인물이다. 농업과 공업이 고루 발전하길 기원하고 있다. <평화>는 새로운 국가 탄생과 웅비를 표현했다. 화면 중앙 후면에 신식 고층 빌딩 도시 양편으로 거대한 독수리 날개가 펼쳐지고, 그 아래 광장 중앙에 사회 지도층, 양 옆에 무리를 지은 다양한 계층, 부류의 인민들, 그리고 전면 중앙에 큰 조개에서 일어나는 흰 드레스의 화려한 신부,높이 펄럭이는 여러 나라의 국기들. 두 작품에서 수에즈 운하가 배경으로 등장하고, 각기 우주개발기지, 우주비행사가 모습을 보인다. 이는 나세르 정권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쟁취를 기념하고, 과학입국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여러 나라 국기들은 비동맹회의를 이끈 이집트의 위상을 나타낸다. 알제자르의 공동체적 국가 이상을 담은 작품 경향은 멕시코 혁명정신을 담아 대형 벽화를 그렸던 디에고 리베라를 떠올리게 한다. 디에고 리베라 역시 앙드레 브루통과 함께 설립한 독립혁명미술연합의 구성원이다. 표현의 자유의 억압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초현실주의가 국가의 발전과 공동체적 해방에 중점을 둔 점에서 이집트와 멕시코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아흐마드 무르시, 새와의 산책II, 1971, 나무판에 유채, 122x121cm, 카이로이집트근대미술관 소장.

     

    다시 이집트 초현실주의 탄생과 계승을 살펴보자. 1939년 '예술과 자유 그룹' 설립을 이끌었던 조르주 헤네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유학파인 헤네인은 당시 유럽 초현실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앙드레 브루통과 긴밀한 교류를 맺고 이집트로 돌아와 문화단체 '에세이스트'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8년 헤네인은 '퇴폐미술이여 영원하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발표했고, 서른한 명의 지식인이 서명한 이 선언문은 예술의 보편성을 주장했다. 이 선언문은 1939년 '예술과 자유 그룹'을 설립하는 데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다. '예술과 자유 그룹'은 1940-45년 사이에 다섯 번의 <자유미술전>을 개최했고, 잡지 '진보'에 기고하거나, 주간신문 '돈키호테'를 발간했다. 이 그룹의 회원들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 반파시즘, 반제국주의, 교육의 개선, 여성의 권리, 빈곤 구제, 그리의 표현과 욕망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며 급진주의적인 사회, 교육, 정치 활동에 참여하고자 했다.

    유난의 관점은 이집트 초현실주의의 사회적 저항 정신을 잘 드러낸다. '예술의 자유 그룹'의 주요 멤버였던 유난은 초현실주의의 개념이 예술운동이기 이전에 사회적 혁명에 대한 요구라고 정의 내렸다. 이와 관련해 유난은 유럽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작가 살바도르 달리와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부조리한 병치들을 과도한 연출로 여겼으며,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사용하는 자동기술법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므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통해 공동체적 해방을 이루는 것은 역부족이라고 주장했다. '예술과 자유 그룹'이 설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1940년때까지 작가들의 작품에는 전쟁의 비극적 경험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전쟁 이후 1946년에 설립된 '현대미술그룹'에는 한층 젊은 예술가들이 참여했고, 그 중에는 '예술과 자유 그룹'이 기획했던 <자유미술전>에 참여했던 작가들도 있었다. 현대미술그룹은 이집트의 미신,신화, 우화, 구전문학 등의 대중 전통에서 이집트 고유의 모티프들을 차용해 고대와 현대, 파라오와 이슬람문화, 현실과 허구를 연결하는 시각적 담론을 생산하고자 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작업에 평범한 이집트 국민의 일상을 투영해 당시에 국민들이 겪었던 빈곤과 억압을 묘사하는 동시에 '예술과 자유 그룹'이 연구했던 집단적 무의식에 대한 초현실주의 개념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자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집트 초현실주의 그후(1965년부터 현재) 작품들도 선보인다. 여기선 이집트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아 근대시기 사회적 변화를 적극적을 반영한 70년대에서 90년대의 이집트 미술을 만나볼 수 있다.

    이다 카르, 정물, 이집트, 1940년대 초, 2.25인치 사각 필름 네거티브, 23.4x22.8cm, 영국국립초상화미술관 제공.

     

    또한 이집트 초현실주의 사진도 선보인다. '예술과 자유 그룹'이 활동하던 시기, 카이로에서 성공적인 사진스튜디오를 운영했던 반 레오를 조명한다.

    이집트 초현실주의가 사회 개혁을 주창한 저항 미술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그야말로 무의식, 꿈을 반영한 초현실주의 풍의 작품, 달리와 샤갈 풍의 작품, 그리고 고양이, 물고기, 새, 수닭, 말 등을 형상화한 신화적 요소의 작품 등 다양한 스타일의 이집트 초현실주의를 음미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국립현대술관 박주원 학예연구사는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 전시 작품들은 한국 근대 역사와 비슷한 게 많다. 한국의 민중미술과 연관지어 문화,사회, 역사적 측면에서 충분히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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