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노동당 관계자들이 공직선거일 법정유급휴일 지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자의 투표권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CBS노컷뉴스 대선기자단 최효신 인턴기자)
5월 1일 '노동절'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리를 쟁취해 온 단결과 투쟁의 역사를 기념하는 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의 주류 사회는 이날을 '근로자의 날'로 부르기를 강권한다. "강성노조 탓에 나라가 어렵다"는 한 대선후보의 궤변에서도 드러나듯이, 노동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데 따른 왜곡은 우리 사회 전반에 똬리를 틀고 있다.
민주노총 법률원장 권두섭 변호사는 "한국 땅에서 노동조합 활동은 독립운동에 준하는 결심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노동절을 나흘 앞둔 지난달 27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린 전국언론노조 법률학교의 첫 강연에서다.
"민주노총 법률원에 있으면서, 노동 현장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는 노조와 노동자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 사회에서 노조를 제대로 꾸려 가기 위해서는, 물론 제가 그때를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항일 독립운동에 나서는 정도의 결심이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돼요."
권 변호사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인류 보편의 열망에서 노동조합의 존재 이유를 찾았다.
"노조의 역사는 200년 정도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법률로 처음부터 노조 활동을 보장한 것도 아니에요. 산업사회 후기 영국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착쥐당하고 살던 중 '이렇게는 못 살겠다' '모임을 만들자'고 한 데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단체가 '유니온'(union), 즉 노조의 시작입니다."
유렵의 초창기 노조 활동은 말 그대로 열악했다. 다음은 당대 유럽 노조에 대한 권 변호사의 설명이다.
"그때 영국과 독일에서는 노동자 단체가 사측에 교섭 공문을 보내면 공모죄, 협박죄로 처벌했습니다. '단체를 만들어 집단의 힘으로 사용자를 협박한다'는 논리였죠. 노사 교섭을 통해 임금이 인상되더라도 '노조가 사용자를 협박해 이득을 취했다'고 해 공갈죄로 처벌했어요."
그는 "초창기 노동법은 사실상 노조 만드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는 수단이었다"며 "선배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이 계속 이어져 이후 노조가 합법적으로 승인됐고, 한국에서도 노동3권(단결권, 단체 교섭권, 단체 행동권)을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소년등과 고위법관…노동자들에 불리한 법률"
지난 2015년 12월 12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 경찰 관계자들이 한 위원장의 인터뷰를 거부한 채 끌고가고 있다. (사진=자료사진/노컷뉴스)
"지금 우리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법률'은 한국 사회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권 변호사는 "법률의 총체는 국회에서 제정되는 법률과 그 법률의 내용을 해석하는 법원 판례, 이를 집행하는 각 행정부의 지침"이라며 "이 법률의 총체는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에게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 대법원에는 14명의 대법관이 있어요. 이 가운데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50대 남성' '서울대' '고위법관' 출신입니다. 대학교 재학 중이나 졸업하자 마자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에 2년 있다가 바로 법원에 판사로 임용되는 과정을 거친, 전형적인 '소년등과'인 거죠. 판사가 되면 500여 건의 사건을 짊어지고 다녀야 하니 상당히 바쁩니다. 그러다보니 대법관들은 주로 노동자들과는 반대쪽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죠."
그는 다수 법관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예전, 변호사들의 판사실 출입이 가능했던 시절에 판사실에 들어가 보면 신문 두 개가 있었어요. 조중동 가운데 하나, 그리고 스포츠신문 중 하나였죠. 제가 그것을 보면서 늘 생각한 게 있어요. '이 판사들이 수십 년간 고위법관으로 승진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여러 쟁점을 받아들이는 인식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겠구나'라고요."
권 변호사는 "이러한 분들이 지금 대법관으로 가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노동사안에 대한 대법원 판례가 좋지 않게 나오는 하나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며 "노동자들은 이렇듯 불리한 법률과 맞닥뜨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 "자주성·민주성·연대성 없다면 노조 아니다"
지난해 5월 1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세계 노동절 대회'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노동조합의 본질적 요소는 자주성, 민주성, 연대성 세 가지"라는 것이 권 변호사의 설명이다. 이는 다시 말해 "자주성, 민주성, 연대성이 없으면 노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자주성에 대해 그는 "근로기준법과 노동법을 보면 노동자 대표, 과반수 노조 등 노동조합에 굉장히 많은 권리를 주고 있다"며 말을 이었다.
"과반수 노조의 위원장은 그 사업장 전체 노동자를 대표해 단체협약서에 서명을 합니다. 노동 조건을 개악시키는 합의를 하더라도 효력이 인정되는 거죠. 결국 노조가 사용자로부터 자주적이지 못하면, 사용자 입장에서는 노조가 아주 효율적인 통제기구가 되는 셈이죠. 그래서 우리는 자주적이지 못한 노조를 '어용노조'라 부릅니다. 어용노조는 노조법에서도 노조로 보지 않아요. 그만큼 노조의 자주성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권 변호사는 노조의 민주성을 설명하면서 "독립적인 회계감사, 공정하고 중립적으로 구성된 선거관리위원회, 공정한 선거를 통한 집행부 선출은 가장 기본적인 민주성"이라며 "노조는 평소에도 조합원들에게 활발한 소통과 자유로운 의견개진의 장을 제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흔히들 노조의 민주적 운영에 대해 '독자적으로 운영하지 않고, 운영위나 대의원대회에서 찬반을 물어 다수결로 결정하면 된다'는 생각 정도로 머뭅니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규약·규정 주요 정보 공개, 충분한 토론과 설득,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의 총체가 민주적인 노조 운영이에요. 그래서 예전부터 노동조합을 민주주의의 척도라고 부르는 거죠."
◇ "임금 노동자 90%가 노동조합 갖고 있지 못하다"
지난해 5월 31일 서울 광진구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 중 사고로 숨진 김모 씨의 친구와 시민단체 회원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권 변호사는 "유럽을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듯이 노동조합 조직율과 단체협약 적용률이 높으면, 그러니까 전체 노동자에 대한 노조의 대표성이 강한 사회일수록 민주주의 수준이 높다"며 이를 노조의 연대성과 연결지었다.
"지금 한국의 노조 조직율은 10%, 단체협약 적용률은 12%에 머물고 있어요. 프랑스의 경우 조직율이 10%로 우리와 같지만, 협약 적용률은 95%에 달합니다. 왜 그럴까요? 대표 노조가 체결한 협약에 대해, 우리로 치면 고용노동부 장관이 노조에 가입돼 있지 않은 동일한 산업, 업종 노동자들에게까지 확대 적용시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체협약을 체결하면 대부분 해당 사업장에만 적용돼요. 그만큼 노조의 대표성이 약한 겁니다."
그는 "한국 사회 임금 노동자의 90%가 노동조합을 갖고 있지 못하다"며 "어용노조를 빼면 그 비율은 더욱 줄어든다"고 지적했다.
"비정규직으로 가면 상황은 더욱 열악합니다. 우리나라 비정규직이 850만 명에 달하는데, 노조 조직율을 보면 지난 15년 동안 2%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늘지 않아요. 언론 보도에서 '노조 만들었다' '파업 중이다' '투쟁하고 있다'는 데를 보면 대다수가 비정규직 노조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지난 10여 년 동안 비정규직 노조가 다 생겼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많은 소식이 올라오지만, 실제로는 노조가 만들어지고 깨지고를 반복하고만 있는 거죠."
권 변호사는 "노조는 당장 사업장에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이 있는지 살펴보는 등 먼저 실태를 파악해야 한다"며 "이를 통해 비정규직을 노조에 가입시키고 연대하면서 그들의 처우까지 함께 개선할 수 있는 요구안을 만들어 투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