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이 1주기를 맞았다. '여성이기에' 죽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 안의 두려움을 용기 있게 발화한 여성들 덕에, 강남역 10번 출구는 '여성의 연대'가 머물렀던 자리로 재발견됐다. CBS노컷뉴스는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의 의미를 짚고, 사건 이후 페미니즘이 보다 활발하게 논의돼 자연스레 일상 속에 들어온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은 '묻지마 범죄'가 아니다② "묵인했던 차별과 혐오가 이런 죽음을 가져왔습니다"③ 페미위키, 핀치…강남역 이후 일상으로 들어온 '페미니즘'<계속>
돌아보면 2015년은 참 이상한 해였다. 칼럼니스트와 방송 진행자로 널리 알려진 김태훈은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희대의 글을 남겼고 개그 트리오 옹달샘(장동민·유세윤·유상무)은 팟캐스트에서 여성비하 발언을 쏟아냈다.
2015년이 공기처럼 존재하는 '여성혐오' 현상이 수면 위로 올라온 해였다면, 2016년은 자신의 정체성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움직임이 보다 증폭된 해였다. 그 발단은 물론, 2016년 5월 17일 벌어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이었다.
그 후, '페미니즘'을 말하는 책이 꾸준히 출판되어 사랑받았고, 기성 정당에서 충분히 보장받지 못하는 페미니즘 가치를 실현하고자 정당을 준비하는 모임이 생겼으며, 페미니즘 행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달력이 만들어졌고, 남성 중심적·여성혐오적인 인터넷 정보에 대항해 '소수자의 입장'을 적극 대변하는 위키가 나타났다. 주위를 둘러봤을 때 더 많은 '페미니즘적 움직임'이 드러나게 된 셈이다.
◇ 출판시장의 키워드로 떠오른 '페미니즘 도서', 열렬한 후원으로 탄생하기도
지난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페미니즘 도서들
지난해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실시(23만 1104명 투표)한 올해의 이슈 1위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12.01%)이었다. 올해의 책 투표에서도 '나쁜 페미니스트'(5.73%)와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5.33%)이 5, 6위로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 알라딘 베스트셀러를 결산한 결과, '나쁜 페미니스트'(38위),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46위), '여성혐오를 혐오한다'(88위)가 100위권에 들었다.
'사회과학' 분야로 범위를 좁히면 페미니스트 도서들의 활약은 더 돋보인다. '나쁜 페미니스트'(1위),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3위),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4위), '여성혐오를 혐오한다'(5위), '페미니즘의 도전'(16위),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30위), '맨박스'(46위) 등 50위권 내에만 7종의 도서가 포함됐다.
이같은 흐름은 단지 '반짝 효과'에 그치지 않는다. 18일 현재 스테디셀러 목록에도 '이갈리아의 딸들'(13위), '여성혐오를 혐오한다'(38위), '페미니즘의 도전'(41위)이 올라 있다.
제작 단계에서부터 참여해 페미니즘 도서에 대한 지지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는 경우도 잦아졌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은 당초 목표액의 2184%인 4369만 5500원을,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은 당초 목표액의 2079%인 4159만 4천원을 모았다. 올해도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와 '헬페미니스트 선언-그날 이후의 페미니즘'이 각각 목표액의 213%, 272%(진행 중)의 후원을 이끌어냈다.
◇ '남성중심적'으로 구성된 웹 정보에 새 바람을
지난해 9월 서비스를 시작한 '페미위키' (사진='페미위키' 트위터 캡처)
지난해 9월 문을 연 '페미위키'
(링크)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인터넷 상의 정보가 여성혐오적이며 소수자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데 착안해 만들어졌다.
'페미위키'는 △현존하는 차별을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기계적 중립 의견 △모든 종류의 사회적 약자 혐오를 바탕으로 한 서술을 거부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여성주의 정보집합체'를 지향하고 있다.
'페미위키'는 페미니즘과 관련된 단어와 각종 사건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 지난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젠더 이퀄리즘 날조 사건', '클로저스 성우 교체 논란', '정의당 문예위 논평 철회 사건'뿐 아니라 '월경컵', '맨박스', '성격차지수', '시스젠더' 등 다양한 페미니즘 개념을 만나볼 수 있다. '임의글'을 눌러 예상치 못한 표제어에 다다르는 것도 페미위키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재미 중 하나다.
◇ '여혐' 없는 미디어 콘텐츠를 즐기고 싶은 당신에게
여성 콘텐츠 플랫폼을 지향하는 '핀치' (사진='핀치' 홈페이지 캡처)
'페미위키'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고민된 표제어를 등록해 웹에서 통용될 수 있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핀치'
(링크)는 여성혐오 없이 만드는 기사·칼럼·영상·웹툰·웹소설을 한 곳에 모아 여성의 다양한 말과 삶을 공유하는 건강한 '여성 콘텐츠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핀치'에서는 생리컵 후기, 페미니스트의 육아일기,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몰래카메라 범죄, 피부관리 비법,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한 여성 솔로 가수 등 다양한 주제의 글이 실려있고, 특정 이슈에 대해 정리할 수 있는 '핀치 클립' 코너도 있다.
'핀치'는 무료로 공개되는 콘텐츠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유료 서비스이기에 '핀치' 내 모든 게시물을 보려면 '핀치 클럽'이라는 멤버십에 가입해야 한다.
'페미니즘+아이디어'의 합성어인 '페미디아'
(링크)는 여성주의 정보생산자조합으로,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활동해 왔다.
△보고 싶은 뉴스와 콘텐츠를 만들어 △여성주의 담론영토를 넓히자는 큰 틀은 같지만, 여성·여성주의·여성운동에 관련된 외신 번역과 국내·외 연구를 소개하며, 여성주의적 시선의 비평을 실어, 보다 학술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지난해 8월 시작된 '한국일보'의 젠더 이슈 코너 '사소한 소다' (사진='한국일보' 홈페이지 캡처)
기성언론에서도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젠더 이슈를 다루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종합일간지 '한국일보'와 시사주간지 '시사IN'에 이 젠더 이슈를 고정적으로 다루는 코너가 마련된 게 대표적이다.
'한국일보'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 소다(탄산수) 같이 시원하게 이야기하자는 의미의 '사소한 소다'
(링크)코너에서 아이돌 팬덤 내 페미니즘 목소리, 남학생 단톡방 언어성폭력 공론화 현상, 화장하는 남자들, 초등 성평등 교육의 효과 등을 다뤘다.
'시사IN'은 필진들이 돌아가면서 쓰는 '불편한 준비'
(링크)라는 코너를 통해 '페미니즘'을 말한다. 그동안 성폭력 문제에서 여성의 '조심성'을 먼저 따지는 풍토, '아이 낳는 기계'로 여겨지는 여성의 몸, 결혼을 거부하는 여성들 등을 주제로 한 칼럼이 연재됐다.
◇ 왜 '페미니즘'을 기치로 내건 정당은 없을까
지난해 5월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 페미니스트 정당 준비모임 '페미당당' (사진='페미당당' 트위터 캡처)
현직 대통령이 대선 후보일 당시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선언했음에도, 기성 정당에서 '페미니즘'은 대선 같은 빅 이벤트 때 외에는 늘 '나중'으로 밀리는 사안 중 하나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이라고 사정이 특별히 더 나을 것은 없었다. 내부에서 성폭력 문제가 일어났고, 부당한 성차별 사태를 비판하는 입장조차 자유롭게 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스트 정당'을 준비하는 모임 '페미당당'
(링크)이 탄생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는지도 모른다.
'페미당당'의 캐치프레이즈는 '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다. '페미당당'은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직후인 지난해 5월 '거울 행동'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여성 누구나 혐오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거울을 들었던 그들은 이후, '클로저스 성우 교체 논란'에 항의했고 여성의 재생산권을 요구하는 '검은 시위'를 벌였으며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졌을 때는 '페미니스트 시국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서울에서 만난 여러 갈래의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페미니스트 인 서울' 프로젝트를 벌이는가 하면, 지난 대선 때는 후보들의 여성 정책을 살펴보는 '페미통령 알고뽑자' 동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 페미니즘 행사 한눈에 보는 달력, 페미니즘 북카페까지
왼쪽부터 '페미니즘 캘린더'와 '카페 두잉'의 로고 (사진=각 SNS 캡처)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행사를 빠르고 손쉽게 알아볼 수 있는 '페미니즘 캘린더'
(링크)도 생겼다.
트위터 계정으로 세미나, 토론회, 북토크, 오프라인 행사, 강좌뿐 아니라 페미니즘 굿즈를 파는 텀블벅 후원 마감일이 언제인지까지 알려준다. 페미니즘 행사를 한눈에 보려면 구글 달력
(링크)을 참고하면 된다.
페미니스트들의 쉼터를 자처하는 북카페
(링크)도 등장했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청담역 5번 출구 1분 거리에 위치한 카페 '두잉'은 젠더 다양성과 평등을 테마로 한 도서를 즐길 수 있고, 페미니즘 세미나가 진행되며, 페미니즘 굿즈를 파는 문화공간이다.
지난 12일부터 '두잉 페미니즘 미술강좌'가 4주 동안 열리고 있으며, 오는 30일에는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의 '한국남자를 분석한다' 북토크가 진행될 예정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