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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인문학의 거짓말: 인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책/학술

    박홍규 '인문학의 거짓말: 인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타락한 인문학, 빈곤한 인문학

     

    '인문학의 거짓말'은 인문의 출발과 고대의 인문에 대한 이야기다. 노예제를 인정한 과거의 계급적 문화인들, 가령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인문에 대해 그 노예제를 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약소국 침략, 남녀 차별주의, 장애인 차별주의 등 모든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 모든 차별은 폭력으로서 폭력 자체와 함께 배제되어야 한다. 전쟁도, 국가폭력도, 국가주의도, 기타 모든 부당한 권력도 거부되어야 한다. 특히 진보는 자기 전공에 대해서는 보수 이상으로 굳은 신앙을 보여준다. 진보일수록 학벌이나 족벌이나 문벌 따위에 갇혀 산다. 그런 패거리 진보의 인문학에는 진보가 없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다. 인문이 모든 인간의 문화를 뜻하는 이상 민주적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특히 소수 인간이 다수 인간을 지배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비민주적 사상을 인문이라고 할 수 없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민주주의자를 가르기 위해서다. 지금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가 개탄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문학으로, 역사로, 철학으로, 예술로 말하는 인문학을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배신하는 인문학은 백해무익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프리드리히 니체나 마이클 샌델에 이르는 반민주주의의 전통은 제국주의적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 그것들이 선진국 인문학이라면 이는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것이 인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아직도 통용된다. 그 단적인 보기가 서양이 비서양을 지배하기 위해 조작한 오리엔탈리즘인데, 더욱 심각한 점은 우리와 같은 비서양에서도 그런 오리엔탈리즘을 훌륭한 인문학으로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인문학이야말로 물질주의의 학문이다. 그런 인문학이 물질의 만능 시대에 유행하고 이를 CEO 등이 주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이보다 반인문적인 행위가 있겠는가?

    유가가 독점적인 권력학문이자 권력종교가 되는 것은 공자에서 시작되었고, 맹자를 거쳐 동중서에 의해서 확립되었다. 미셸 푸코는 ‘지식은 권력적’이라고 했지만,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유가와 유학은 권력 자체였다. 유가나 유학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려면 그러한 권력성에서 탈피해야 한다. 국가나 종교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리하여 민학적인 인문학의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인문학은 인민학이자 인간학이 되어야 한다. 비판은 없고 찬양뿐인 사대 인문학을 참된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문학은 서양 제국주의와 동양 제국주의를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미국만이 아니라 그리스·로마부터 영국이나 프랑스의 제국주의까지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부추기며 선동하는 인문학을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인문의 원리는 자유, 자치, 자연이다. 이러한 원칙은 ‘나’의 자유, ‘우리’의 자치, ‘세계’의 자연이라고 하는 3가지로 인류 문화인 인문이 구성됨을 뜻한다. 그런데 자유와 자치와 자연은 그 어느 것이든 간에 언제 어디서든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되 보편성을 갖는 것이다. 이는 자유와 자치와 자연이 각각 대응하는 인간과 사회와 세계가 균질성이나 획일성이 아니라, 보편주의와 다원주의에 의해 항상 움직이는 것임을 뜻한다. 보편주의는 그것이 그 탐구의 ‘출발’점에서 미리 주장되어 타인에게 강요되거나 그 ‘최종’의 목표로 미리 결정되어 그 속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이해하기 위해 공통의 공간을 탐구하는 ‘과정’의 보편주의이기 때문에 언제나 다양하게 나타난다. 간단히 말해 이는 상호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서로의 ‘보편’을 찾아 대화를 계속하는 것이다.

    인문이란 삶의 질을 높이자는 것이다. 한국은 지나치게 물질 중심적이고, 사회적 관계의 질이 낮다. 이는 한국의 낮은 행복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즉, 한국은 인문의 절대적 빈곤국이다. 과거로 상징되는 사회적 지위나 경쟁에 집착하지 말고 내면의 인문적 추구라는 즐거움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그런 정신적 빈곤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의 인문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자치하는 사회를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평화와 협력과 연대가 필요하고, 권위(국가)주의나 투쟁(경쟁)주의나 갈등(계급)주의나 패거리(집단)주의나 전체(획일)주의는 없어져야 한다. 인문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이 중심이어야 한다. 그래서 인문은 휴머니즘이어야 한다.

    책 속으로

    지금 세계는 그따위 황당무계한 국제법의 차원은 벗어났다고 하지만 국제법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그런 구분이 존재한다. 단적인 보기로 우리는 지난 1세기 동안 끊임없이 후진국, 빈곤국, 야만국 등이라는 콤플렉스에 젖어왔고, 서양을 닮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왔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국시로 삼은 근대화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구호이고, 그 말이 다르게 변용되었어도 여전히 우리의 믿음으로 남아 있다. 심지어 얼굴까지 서양인처럼 뜯어고치는 풍조가 어떤 나라보다도 심하다. 그보다 문제인 것은 정신의 식민지화, 인문의 빈곤이다. 「첫 이야기」(본문 19~20쪽)

    내가 니체를 반민주주의자라고 보는 책을 쓰자 니체를 전공한 어느 철학 교수가 반론을 썼지만, 굳이 답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그런 찬양 게임에 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니체 전공 철학자들에게 그런 비판은 쇠귀에 경 읽기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런 전공자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일반인들은 나 같은 사람을 철저히 무시한다. 그러니 지금 생각하면 그런 책을 힘들게 쓸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물론 그래도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니체에게 불필요하게 현혹되어 반민주주의자가 되지 않는 계기가 된다면 다행이다. 아니 니체에게 반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나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책은 몇 권 나오지도 않았는데, 민주주의를 욕한 니체의 책은 그 수백 배를 능가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사실 칸트나 헤겔도 비판해야 한다. 아도르노는 왜 그들을 비판하지 않았을까? 「그리스, 페르시아, 헤로도토스」(본문 271~272쪽)

    박홍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 492쪽 | 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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