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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불량에 정신질환까지…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잃어버린 5년

경제 일반

    신용불량에 정신질환까지…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잃어버린 5년

    검찰의 현대차 '노조파괴' 개입 묵인… 하청노동자들은 어떤 일을 겪었나

    지난 2011년 충남 아산 유성기업 공장에 투입된 경찰들이 점거 농성을 벌이던 노조원들을 연행하고 있다. (사진=자료사진)

     

    지난 3월 4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앞에 하얀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행진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검은 근조 깃발에는 '열사정신계승', '현장탄압분쇄' 등의 문구가 쓰여있었다.

    유성기업 노동자 한광호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353일만에야 치른 뒤늦은 장례식이었다.

    ◇ 1년이나 늦은 장례식보다 더 늦은 5년여 만의 검찰 기소

    앞서 지난해 3월 한광호씨는 자신의 고향에 있는 부친의 묘소 인근 한 공원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회사의 징계위원회 사실조사 명령을 받은 지 불과 사흘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미 한 씨는 6년 여에 걸친 유성기업 노사 갈등이 시작됐던 2011년 이미 파업 참여 등을 이유로 징계를 받았던 터였다. 이후에도 쟁의 행위 도중 사측과 충돌하면서 부상을 입는가 하면, 각종 명목으로 사측으로부터 5차례 고소를 당했다.

    숨진 한광호씨를 차마 1년 가까이 놓지 못했던 민주노총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이하 노조)가 뒤늦게나마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던 것은 지난 2월 내려진 판결 덕분이다.

    당시 대전지법 천안지원은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유성기업 유시영 대표이사에게 징역 1년 6개월과 벌금 200만원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심지어 검찰이 구형한 징역 1년보다 높은 형량이었다.

    그리고 지난 24일에는 대전지검 천안지청은 유성기업 '노조파괴'에 관여한 혐의로 원청업체인 현대자동차 임직원 4명을 기소했다. 대기업이 협력업체 노사관계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노조는 이번 검찰의 기소가 5년 넘게 늦었다고 입을 모은다. 사상 처음으로 원청업체의 책임을 물은 검찰의 파격적인 기소조차 늦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지난 2014년 3월 15일 충남 아산 유성기업에 집결한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유성기업 노조원들과 회사에 들어선 뒤 ‘노조파괴를 한 회사 대표를 구속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 (사진=자료사진)

     

    ◇ 2011~12년 증거 확보한 검찰, '혐의없음' 처분한 이유는

    2011년 5월 유성기업 노사는 주간연속 2교대제 시행을 앞두고 갈등을 빚던 중 노조는 부분 파업에 돌입했고, 사측은 직장 폐쇄로 맞섰다. 거센 몸싸움 끝에 노조가 공장에서 점거 농성에 돌입하자, 사측은 곧바로 용역업체를 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유성기업 노조를 이끌었던 홍종인 전 지회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유성기업 안에 상주했던 현대차 총괄구매이사가 사측 관리자와 공장 밖으로 피신해서 승용차를 돌려주기로 약속했다"고 설명했다.

    홍 전 지회장은 "차 열쇠를 주고 받다 차량 위에 놓인 서류뭉치를 우연히 발견했고, 내용을 살펴보니 직장폐쇄와 용역투입 시기 등이 자세히 정리된 문건이었다"며 "문건을 통해 유성기업 뿐 아니라 현대차의 개입은 그 때부터 이미 확인된 일"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발견된 문건은 '유성기업(주) 쟁의행위 대응요령'과 '유성기업 주간연속 2교대 도입관련 문제점 방향' 등이다.

    이 문건에는 유성기업의 주간연속 2교대 합의가 현대차 노사 교섭에 변수로 부각될 수 있다며 유성기업 노사의 합의를 지연하도록 권고하는 내용과 함께 직장폐쇄, 용역 투입 시기까지 담겨 있었다.

    다음해 검찰은 유성기업과 관련 문건 작성을 도운 노무법인 창조컨설팅 등을 압수수색해 관련 이메일·회의문건까지 확보했다. 이 자료들은 이번 검찰 기소장에도 핵심 증거로 제시될 만큼 부당노동행위를 증명할 증거가 가득했다.

    압수된 자료에 따르면 유성기업은 창조컨설팅 자문에 따라 직장폐쇄-용역 투입 등 파업 대응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사측과 가까운 제2노조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차는 유성기업의 노조 관리사항을 수시로 보고받았다. 특히 2011년 파업 직전에는 '부품 납품에 차질을 빚으면 주문량을 줄이겠다'고 압박하면서 제2노조 목표 가입인원까지 지정했다.

    그러나 검찰은 원청 기업은 하청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사용자가 아니므로 법률상 책임을 묻기 어렵다며 당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더구나 검찰은 유성기업의 부당노동행위 등에 대해 노동청에 보강수사 지시를 수차례 내리며 2년 가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특히 현대차에 대해서는 '현대차 임원과 유성기업 측이 관련 회의는 가졌지만, 구체적인 노조 탄압 사례가 없다'며 혐의없음 처분을 내렸다.

    홍 전 지회장은 "노동청 담당 수사관이 '구속 의견을 아무리 내도 검찰 지휘를 받다 보니 결국 불구속 의견을 낼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며 "이 내용이 국회에 노동부 공식입장으로 제출돼 전말이 드러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 "신용불량에 이혼·정신질환까지… 檢 늦장기소가 목숨까지 빼앗아"

    이처럼 '현대차 감싸기' 의혹을 받던 검찰이 공소시효를 불과 사흘 앞에 남겨두고 이례적으로 현대차 임원을 '전격' 기소하면서 자연스레 '정권 눈치보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유성기업 노사 문제가 논란으로 불거졌던 2011년 이명박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에서 유성기업 노조원들에 대해 '연봉 7천만원을 받으면서 불법파업을 벌인다'고 맹비난했다.

    반면 새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친(親)노동 정부를 자임하고 나서자 검찰도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꿨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유성기업 노조가 정권교체 과실을 가만히 앉아 따먹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장기투쟁 노조들처럼 이들은 거의 할 수 있는 모든 투쟁을 벌였다.

    고가다리에서 151일, 광고탑에서 25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였다. 조계사와 현대차 사옥 앞, 대전지검 천안지청 등 곳곳에서 단식을 하고, 서울과 대전 등을 오가며 오체투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유성기업 노조원들은 극심한 노사갈등을 겪었다. 2011년 노사 충돌 이후 한광호 열사 외에도 유성기업에서는 2명이 더 숨졌다. 특히 2012년 12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모 씨는 제2노조로 가입한 직후 5차례나 자살을 시도하다 끝내 숨졌다.

    현재도 사측이 노조와 13명의 노조간부를 상대로 제기된 11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과 11명의 해고 노동자들이 제기한 해고 무효 소송 모두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또 충남노동인권센터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유성기업 노조원들의 우울증 고위험군은 43.3%다. 보건복지부 조사에서 우울장애를 가진 경우가 10%를 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유독 높은 수치다.

    홍 전 지회장은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 시나리오대로 사측이 교섭에 응하지 않아 수년째 임금이 동결된 상태"라며 "여기에 더해 손배가압류 등으로 개인파산, 신용불량 등에 쫓겨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이혼하고, 정신병에 시달리는 노동자가 많다"고 호소했다.

    이어 "검찰의 늦장 기소로 지난 세월 동안 노동자들이 입은 피해는 치유할 방법조차 없다"며 "현대차 임원들의 혐의가 인정되고 형량을 받을지, 아니면 증거 불충분으로 또다시 면죄부를 줄지 모르겠으나 지금이라도 철저히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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