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투표제 의무화는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때 내걸었던 주요 공약의 하나이다.
왜 전자투표제 의무화가 주요 공약으로 꼽힌 것일까. 전자투표제는 주주가 주주총회에 참석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의결권을 행사하는 제도이다.
전자투표제는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주주가치 중시 경영과 디지털 기업경영을 위해 2천년대 초부터 실시하고 있고 우리나라에는 2010년부터 도입돼 시행되고 있다.
주주총회 개최지가 주로 서울과 경기에 집중되고, 개최일도 매년 3월 특정요일간에 집중되어 회사의 의결권 확보를 위해서는 전자투표 도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전자투표를 채택하려고 하는 기업들은 전자투표 관리기관인 한국예탁결제원과 계약을 체결하고 예탁결제원의 전자투표시스템에 주주명부와 주주총회 의안 등을 등록하면 된다.
그러면 주주는 주주총회에 직접 참석하지 아니하고 이 시스템에 따라 전자적인 방법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게 된다.
전자투표제 의무화는 기업들의 전자투표 도입을 의무화한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 3월말 현재 전자투표 관리기관인 한국예탁결제원과 전자투표 계약을 체결한 법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는 348개사(45%), 코스닥시장에서는 64.6%(787개사)에 이른다.
상장기업의 상당수가 이미 전자투표를 채택하고 있고 앞으로 그 비율은 계속 높아지는 상황에서 도입 의무화를 굳이 공약에다 넣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전자투표제 의무화는 도입 의무화가 아니라 주주총회에서 모든 의결을 전자투표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전자투표제를 의무화한다는 것은 전자증권시대에 맞춰 주주들의 주주권 행사를 전자적 방식에 의해서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주들의 투표가 전자화됐을 경우 주주들의 참여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주주행동주의가 강화되면서 기업의 건전성과 투명성이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현재 많은 기업들이 전자투표를 채택하고 있지만 그 행사율은 극히 저조한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지난 3월 주총에서 전자투표가 행사된 주식의 비율은 주식 수 기준으로는 전체의 2.1%, 주주 수 기준으로는 0.2%에 지나지 않았다.
전자투표제를 도입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행사율이 저조한 것이다. 이것은 주주들의 전자투표에 대한 관심과 참여도가 낮은 데 일차적인 원인이 있지만 기업들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기업이 전자투표를 채택한 것은 전자투표를 통해 주주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섀도보팅(Shadow Voting)을 허용받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
*섀도보팅(Shadow Voting) : 정족수 미달로 주주총회가 무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주가 주주총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투표한 것으로 간주, 주총에 참석한 의결권 행사 주식의 찬성과 반대 비율을 의안 결의에 그대로 적용하는 일종의 의결권 대리행사 제도섀도보팅은 지난 1991년부터 시행돼 왔으나 소수 경영진이나 대주주의 경영권 강화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비판에 따라 2015년부터 폐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를 폐지할 경우 주주총회 성립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상장사협의회 등의 반발에 부딪쳐 전자투표를 채택한 기업에 한하여 2017년말까지 조건부 유예가 돼있는 상황이다.
많은 기업들이 전자투표를 채택한 이유는 바로 섀도보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 3월 주총에서 전자투표를 이용한 705개 사 가운데 644개사(91.3%)가 섀도보팅을 신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업들의 관심이 선진국과 같은 주주권이나 주주가치 중시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업들이 주주들을 상대로 전자투표를 행사하도록 적극적으로 독려하리라고 기대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전자투표제 의무화는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할 수 있다.
주총의 의결을 전자투표로만 하도록 할 경우 기업들은 의결정족수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주주들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전자투표 행사를 독려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올해 말까지로 돼있는 섀도보팅 만료시한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첫 걸음이다.
현재 상장사협의회 등을 중심으로 섀도보팅 연장 주장이 솔솔 나오고 있다.
하지만 연장할 경우 전자투표제 의무화는 무력화될 수 밖에 없다.
황세운 실장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섀도보팅을 없애지 않으면 악순환이 계속된다. 섀도보팅이 존재하는 한 기업들이 전자투표를 활성화시킬 인센티브가 전혀 없다. 이것은 좌파의 논리가 아니라 소액주주와 주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대주주의 전횡이 문제되고 있는 현실에서 주주들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회사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전자투표제 의무화이다.
황세운 실장은 “소액주주의 주주총회 참여는 중요하다. 이는 선거 때 투표에 국민들이 많이 참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주주들이 어떤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주주권을 행사하느냐에 회사의 미래가 달려있다. 현대자동차의 한전부지 매입과 같은 대주주의 잘못된 의사결정을 막기 위해서는 전체 주주의 이해가 투명하게 반영될 수 있는 전자투표와 같은 장치마련이 필요하다.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이 조정되는 과정에서 기업의 지속가능성도 오히려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기본적인 견해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