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사오보(사진=유튜브 영상 캡처)
2010년 12월 노르웨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은 할리우드 스타인 댄젤 워싱턴과 앤 헤서웨이가 참여할 정도로 화려하게 진행됐지만 정작 수상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수상자 대신 수상자가 앉았어야 했을 빈 의자만이 썰렁한 시상대를 채우고 있었다. 수상자는 그 시간 오슬로에서 7천km 넘게 떨어진 중국 랴오닝(遼寧)성의 한 교도소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모습조차 볼 수 없었지만 중국 대륙의 이단아, 류샤오보(劉曉波·61)의 이름이 전 세계인들의 가슴에 각인됐던 순간이다.
◇ 지린성 출신 문학도 톈안먼 민주화운동으로 투사가 되다1955년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에서 태어난 류샤오보는 지린 대학 중문과 재학 시절부터 문학 서클에서 활동했던 문학 청년이었다.
1982년에는 베이징 사범대 중문과 대학원에 입학해 문학석사학위를 받은 후 같은 대학에서 강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문학비평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1989년 그가 받은 박사학위 청구논문의 주제가 ‘미학과 인간의 자유’였던 점에서 보듯이 그는 순수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던 문학도였다. 하지만 이때 까지만 하더라도 정치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89년 발생한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운동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1989년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 버나드 칼리지(Barnard College)에 방문 연구원으로 유학 중이던 류샤오보는 톈안먼에서 소요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각 귀국,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류샤오보는 톈안먼 광장 사수를 주장한 강경파들에 맞서 왕단(王丹), 우얼카이시(吾爾開希) 등과 함께 시위대의 광장 철수를 주장했고 무력 진압이 시작된 6월 4일 새벽에는 계엄군과 타협하여 학생들의 철수를 돕기도 했다.
6월 2일 ‘톈안먼 4군자’로 불리게 된 저우둬(周舵), 허우더젠(侯德健), 가오신(高新)과 함께 벌인 ‘6.2단식투쟁’ 선언문에서는 “우리에게는 적이 없다! 증오와 폭력으로는 우리의 지혜와 중국의 민주화 과정을 막을 수 없다.”며 공산당 정부와 학생 모두의 반성을 촉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사흘 뒤인 6월 5일 체포돼 ‘반혁명 선전선동죄’로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곧바로 당국에 의해 사면을 받은 것 역시 그의 비폭력적 성향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 톈안먼 후에도 중국을 지키며 수차례 투옥류샤오보의 행보가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기 시작한 때는 톈안먼 민주화운동 이후부터였다.
대부분의 톈안먼 지도부가 해외 망명을 통해 중국을 떠나는 순간에도 류샤오보는 중국을 지키며 4차례나 체포, 구금되는 고난의 길을 택했다.
앞서 톈안먼 민주화운동 직후 체포돼 유죄 선고를 받은 뒤 사면된 것을 시작으로 1991년 1월 ‘반혁명 선전선동죄’를 선고받았다가 형사처벌 면제 처분을 받았고, 1995년 5월 18일에는 6.4 톈안먼 운동 6주년을 기념해 톈안먼 운동 재평가를 요구하는 청원운동을 벌이다 9개월간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중국의 대만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10.10선언’을 발표해 ‘사회질서 교란죄’로 체포되어 노동교양 3년 처분을 받았다.
그는 지난 2008년 12월 ‘08헌장’의 발표를 준비하던 중 공안당국에 발각돼 징역 11년 형이 확정되면서 그가 임종시까지 지냈던 랴오닝(遼寧) 성 진저우(錦州) 교도소에 수감됐다.
체코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의 ‘77헌장’을 본따 만든 ‘08헌장’에서 류샤오보는 중국의 일당 독재체제가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톈안먼 민주화운동’ 등의 사건에서 인권을 탄압하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것을 비판하며 체제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재판을 받을 당시 그는 ‘나에게는 적이 없다’는 글에서 “증오는 지혜와 양심이 아니다, 적대적인 감정은 국가의 영혼을 오염시키고, 야만적인 삶을 악화시키고, 사회의 관용과 인간성을 파괴한다. 또, 국가가 자유와 민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고 역설했다.
◇ 2010년 노벨상 옥중 수상, 2017년 간암 말기 판정2010년 10월 노르웨이의 노벨위원회는 그해의 평화상 수상자로 중국의 류샤오보(劉曉波)를 선정했다.
“중국의 근본적 인권을 위한 그의 오랜 비폭력 투쟁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 수여 이유였다.
세계는 빠르게 류샤오보를 석방하라며 중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08헌장’의 모델인 된 ‘77헌장’을 만들어낸 체코의 하벨 전 대통령은 2010년 사회주의 시절의 반체제 인사들을 규합해 프라하 주재 중국대사관에 류샤오보의 석방을 청원했고 같은 해 유럽의 중국학회는 36개국의 학자 800명의 서명을 담은 서한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서방의 압박이 강해질 수록 중국 정부의 입장은 더욱 단호해 졌다.
중국 정부는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식 참석을 불허하는 한편 그의 부인 류샤(劉霞)마저 일시적 가택연금에 처해 버렸다.
또 외교적 루트를 통해 노르웨이에 초대된 64개국 대표 중 17개국의 참석을 사전 봉쇄했다.
중국 내부 단속도 철저했다. 중국 정부는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과 류샤오보에 대한 보도를 철저히 금지하고 바이두, 시나닷컴 등 중국 포털사이트에서 류샤오보 수상 관련 기사와 블로그를 차단하면서 중국인들의 뇌리 속에서 류샤오보를 격리시켰다.
결국 시상식은 수상자 없이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류샤오보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감금해 놓은 조국에 첫 번째 노벨상의 영광을 안겨준 인물이 됐다.
하지만 노벨상의 영광은 거꾸로 류샤오보에 대한 중국 당국의 통제를 더욱 철저하게 만들었다.
류샤오보는 지난 5월 말 감옥에서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으며, 중국 당국은 6월에야 그를 가석방해 선양 소재 중국의대 제1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했다.
류샤오보가 간암 말기가 될 때까지 제대로 의료적 조치를 받았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원래 간염보균자였던 류샤오보가 간암 말기로 진행될 때까지 중국 정부가 사실상 그를 방치했다는 주장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류샤오보는 자신의 삶이 얼마 안남았다는 것을 깨닫자 아내와 함께 중국을 떠나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중국 정부는 이마저도 완강히 들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