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후 제21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이 열리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세텍 전시장은 만화가 이현세(61)와 사진 한 장을 찍으려는 이들로 넘쳐났다.
젊은이들부터 나이 지긋한 어른들까지 몰리면서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 붉은색 모자에 선글라스를 경쾌하게 얹은 작가의 얼굴에도 자연히 웃음이 번졌다.
올해 SICAF는 이현세 특별전을 마련했다. 1979년 베트남전쟁을 다룬 '저 강은 알고 있다'로 데뷔한 이후 '공포의 외인구단'(1982), '떠돌이까치'(1987), '남벌'(1994), '천국의 신화'(1997) 등 흥행작과 문제작을 잇달아 내놓으며 만화의 역사와 함께해온 거장에게 박수를 보내는 자리다.
전시장에 도착하자마자 만화계 선후배 동료와 팬들에게 에워싸인 작가는 "전시를 한다 하니 낯설고 힘들어서 일주일 전부터 안절부절못했다. 오늘 아침에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면도도 안 하고 나왔다"면서 쑥스럽게 웃었다.
전시는 만화가 이현세의 일대기를 따라 인생의 주요 사건과 주요 작품을 배열하는 식으로 꾸며졌다.
경상북도 경주에서 보낸 유년 시절, 학교 뒷문 만화 가게에서 만화책을 한 장씩 찢어다가 따라 그리기를 반복했다는 일화가 출발점이다. 어느 날 그 현장을 발견한 주인아저씨는 화를 내지 않고 "네가 그 유명한 화가 지망생이로구나"라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한다.
전시장을 찬찬히 둘러본 작가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지난 만화 인생을 돌아보니 마라톤 풀 코스를 뛴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미련도 여한도 없어요. 고비 고비가 많았는데 물론 아쉬웠던 순간도 있고 회한도 남지요. 하지만 다시 뛰고 싶지는 않을 정도로 열심히 뛰었다고 생각해요."
그는 '공포의 외인구단'을 시발점으로 '까치' 시리즈가 나올 때를 '작가 인생의 정점'으로 꼽았다.
'천국의 신화'로 6년간 재판을 받으면서 사회적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을 때는 정체성을 고민해야 할 정도로 괴로웠던 순간이었다. 작가는 "가족, 특히 아이들 덕분에 그래도 계속 이 길을 올 수 있었다"면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인데도 아버지를 독립투사처럼 믿어줬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과거에는 만화가 대중문화로도 인정받기 어려울 때였기에 만화 인생은 곧 투쟁의 기록이었고, 투쟁만큼 즐거움도 배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내가 가면 길이 됐으니까"라고 덧붙이는 그의 표정에서는 한국 만화의 오늘을 만들어왔다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작가는 2015년부터 인터넷 포털에 '천국의 신화'를 연재 중이다. 웹툰 작가 신인상을 받기도 한 거장은 "만화는 가로 동선, 웹툰은 세로 동선이고, 웹툰은 컷과 컷 사이를 넓게 쓸 수 있으니 연출 동선이 아주 많이 다르다"면서 "작업이 수월하고 안 하고 떠나 서로 호흡이 다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이현세라는 작가의 만화를 보여주는 전시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았고, 얼마나 자기 만화를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이현세를 '읽어내려가는' 전시로 봐줬으면 합니다." 이현세 특별전을 포함한 행사는 30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