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13도 대표가 모여 선포문과 결의사항을 낭독했던 '봉춘관',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린 '아서원', 1935년 조선유도유단자 창립대회가 개최된 '대관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조선 이주로 생겨나기 시작한 중화요리점이 100년 전에도 사람들이 즐겨 찾는 외식 장소였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정희 인천대 교수는 한국사회사학회가 발간하는 학술지 '사회와 역사' 제114집에 게재한 논문에서 일제강점기에 화교가 운영한 중화요리점이 단지 '중국인을 위한 중국음식'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린 음식점이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대만과 일본에 남아 있는 자료와 신문기사를 통해 중화요리점이 처음 국내에 문을 연 것으로 추정되는 188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고급 중화요리 음식점과 호떡, 계란빵 등을 판매한 호떡집을 분석했다.
조선총독부가 1930년 10월 시행한 국세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중화요리점은 1천635곳, 호떡집은 1천139곳으로 중국 음식점과 과자점은 모두 2천774곳에 달했다. 이는 전체 식당의 4.4%로, 일본 음식점보다는 약 1천 곳 적었다.
중국 음식점과 과자점은 특히 수도권에 많았다. 서울과 인천, 경기도에 534곳이 있었고, 함경북도 390곳, 함경남도 311곳, 평안남도 217곳이 운영됐다.
이 교수는 "화교 인구의 4분의 1이 살았던 평안북도에는 중국 음식점과 과자점이 186곳밖에 없었다"면서 "화교 중화요리점의 영업이 화교 인구에 절대적으로 좌우되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경북 현풍, 용궁, 예천에도 중화요리점이나 호떡집이 있었다"면서 "작은 규모의 식당은 농촌의 군 지역까지 침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에서의 중화요리점 인기는 당시 일본의 상황과 비교하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30년 일본에 있었던 중국 음식점과 과자점은 1천388곳으로, 우리나라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이 교수는 "일본보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화교가 많았고 화교 상업도 발전했다"며 "일본의 중화요리점은 대체로 대도시 주변에 있었고, 호떡집과 같은 식당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번 연구에서 1930년대 중국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짜장면이 아니라 '우동'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는 1930년 9월 대구부가 대공황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에 직면하자 음식 가격 인하를 단행했는데, 이때 우동이 대표적인 중화요리로 거론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우동은 '호면'(胡麵) 혹은 '청국우동'으로 불렸다. 이 교수는 "일본의 우동과 구별하기 위해 청국우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을 것"이라며 청국우동의 형태는 나가사키짬뽕과 비슷한 하얀 국물의 짬뽕이나 지금 중화요리점에서 파는 우동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중화요리는 기본적으로 조선인의 입맛에 맞았을 뿐 아니라 하층민부터 상층민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가격대의 음식을 갖추고 있었다"며 "화교 중화요리점의 급속한 발전은 중화요리 대중화, 중화요리 동업조합 결성 덕분에 가능했다"고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