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농구 대표팀 (사진 제공=대한민국농구협회)
필리핀은 예상대로 방패를 내려놓고 창을 들고 달려들었다. 방패냐 창이냐, 한국도 창을 앞세워 맞섰다. 창과 창이 부딪히는 무력 대결. 골밑과 외곽슛이 함께 폭발한 한국 남자농구의 창이 더 날카로웠다.
허재 감독이 이끄는 한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17일(한국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열린 2017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아컵 필리핀과의 8강전에서 118-86 대승을 거뒀다.
2010년 이후 아시아 메이저급 무대에서 맞대결을 펼쳤을 때마다 한자릿수 점수차 접전을 펼쳤던 양팀의 대결은 싱거웠다. 팽팽한 승부가 펼쳐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한국이 필리핀을 32점차로 크게 눌렀다.
한국은 1쿼터에 26점을 넣었고 2쿼터에 31점을 기록했다. 대표팀의 이번 대회 1쿼터, 2쿼터, 전반전 최다득점 신기록이다.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3쿼터에 29점을 올렸고 4쿼터에 32점을 퍼부어 최종 118점을 올렸다. 카자흐스타전에서 기록한 116점을 뛰어넘어 팀 최다득점 신기록도 갈아치웠다.
대표팀은 저돌적인 공격농구를 펼친 필리핀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고 맞불을 놓았다. 김선형과 오세근이 중심을 이룬 대표팀의 화력은 필리핀을 능가했다.
대표팀에게는 '인생 경기'였다. 3점슛 21개를 던져 16개를 넣었다. 무려 76.2%의 성공률을 기록했다. 국제대회에서 아무리 약한 상대를 만나도 나오기 힘든 숫자다.
또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는 팀 플레이의 가치를 또 한번 자랑했다. 무려 34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한국이 기록한 총 야투 개수는 44개. 어시스트 동반 야투 성공의 비율이 77.3%였다.
필리핀의 총 어시스트 개수는 14개에 불과했다.
필리핀은 전반전에만 22점을 기록한 로메오와 베테랑 가드 제이슨 카스트로 윌리엄 등 선수들의 개인기에 의존했다. 한국은 달랐다. 끊임없는 움직임과 이타적인 플레이를 펼쳐 동료의 득점 기회를 노렸다. 효율은 당연히 한국이 앞섰다.
김선형은 21점 4어시스트 3스틸을 올리며 한국의 공격을 이끌었다. 야투성공률은 무려 81.8%(9/11). 한국은 속공 득점에서 17-7로 크게 앞섰다. 김선형의 공이 컸다. 김선형이 돌파하면 골밑과 외곽에서 동시에 기회가 생겼다. 김선형은 직접 공격을 마무리할 능력도 있었다. 필리핀 수비는 크게 흔들렸다.
오세근은 22점 5리바운드를 올렸다. 공격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골밑에서 1대1 공격으로 득점을 올릴 수 있는 오세근의 능력이 빛을 발했다.
오세근은 중거리슛도 여러 차례 성공시켰다. 오세근이 밖으로 나오면 상대 수비가 급하게 따라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는 가드들이 돌파할 공간을 창출하는 효과를 냈다. 이승현 역시 비슷한 역할을 했다. 이승현은 3점슛 3개를 넣으며 14점을 보탰다.
김종규는 전반전 대표팀의 분위기를 끌어올린 주역이었다. 기동력과 운동능력이 좋은 김종규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스크린을 하고 골밑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이 위력적이었다. 김선형과 박찬희, 이정현은 2대2 플레이에서 상대 수비를 자신에게 몰아놓고 감각적인 패스로 김종규의 기회를 살려줬다. 김종규는 15점을 올렸고 75%(6/8)의 성공률을 올렸다.
이처럼 빅맨들은 각자 다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32점차 대승에 기여했다. 이타적이고 위력적인 패스를 건넨 가드들과의 조화가 빛을 발했다. 2미터 포워드 최준용은 가드와 빅맨 사이를 넘나드는 플레이로 특히 한국의 제공권 싸움에 큰 힘을 보탰다.
이정현은 3점슛 3개를 포함, 11점을 올렸고 어시스트를 6개나 기록했다. 박찬희는 13분동안 9점 9어시스트 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다재다능한 능력을 뽐냈다.
한국 남자농구 대표팀을 이끄는 허재 감독 (사진 제공=대한민국농구협회)
벤치 멤버들도 나올 때마다 높은 공헌도를 보였다. 공격에 소극적인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 허웅은 3점슛 3개를 시도해 100% 성공률을 보이며 9점을 보태는 등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한국은 벤치 득점에서 필리핀에 49-45로 앞섰다.
한국은 이날 승리로 5경기 평균 91.4점을 올려 대회 팀 득점 부문 1위로 올라섰다. 어시스트 부문에서는 27.8개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김주성, 양동근, 조성민 등 남자농구 대표팀의 터줏대감들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오세근, 김선형, 김종규, 이정현 등이 채웠다. 현재 KBL 프로농구를 주름잡고 있는 그들의 장점 중 하나는 과감하고 공격적인 플레이다. 이는 대표팀의 색깔을 바꿔놓았다. 최근 아시아 대회에 나선 대표팀 가운데 이보다 화끈한 농구를 펼친 팀은 없었다.
C조 조별예선에서는 승부처에서 실책 등으로 흔들릴 때가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직력이 더 나아지면서 이같은 약점도 조금씩 보완되고 있다.
한국은 필리핀에게 86점을 내줬지만 수비 문제를 지적해서는 안되는 경기였다. 양팀 모두 공격이 수비를 압도하는 경기를 펼쳤기 때문이다.
한국은 2013년 대회 이후 두 대회만에 다시 4강 무대에 진출했다. 허재 감독은 레바논 출정을 앞두고 설정한 목표를 이뤘다.
새로운 팀 컬러를 장착한 한국 남자농구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대표팀은 이제 1997년 이후 이루지 못했던 아시아컵 정상에 도전할 자격을 얻었다. 넘어야 할 벽은 높기만 하다. 이란과 중국, 호주 등 우승후보들과의 대결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