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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문소리의 인생 3막, '민낯'을 드러낼 용기

    [노컷 리뷰]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발견한 단면들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배우 문소리 역을 맡고, 연출을 담당한 문소리 감독. (사진=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스틸컷)

     

    연기력보다는 외적 매력이 중시되고, 상은 많아도 역할은 없는 현실. 배우 문소리가 감독으로 데뷔한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는 오늘날 한국 여성 배우들이 처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18년 간 한국 영화계에서 여성 배우로 살아온 문소리가 직접 담아낸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별다른 치장 없이도 진정성을 확보한다.

    3막으로 나눠진 영화에서 문소리는 문소리 역을 맡아 주인공으로 연기까지 펼친다. 영화 속 1인 2역이 아니라 실제 영화 제작에서 1인 2역을 해낸 셈이다. 예산이 그리 많지 않은 단편영화프로젝트인만큼, 영화는 문소리와 출연 배우들이 대부분을 이끌어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막부터 3막까지 문소리가 드러내는 주제의식은 명확하게 이어진다. 여배우로서의 삶, 인간 문소리로서의 삶, 그리고 영화인으로서의 삶이다. 모든 이야기는 오직 문소리만의 공간인 카니발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안에서 문소리는 밝게 웃거나 즐거운 모습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중년의 사회인처럼 보인다. 화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낯이 아니라, 문소리가 보여주는 일상과 그 속에 흐르는 고뇌가 삶의 '민낯'을 드러낸다.

    1막에서 문소리는 캐스팅에서 밀렸다는 통보를 받은 후, 친한 지인들과 등산을 나선다. 그곳에서 우연히 제작사 대표를 만나 문소리답게 '강하고 센' 역할을 제안 받는다. 등산을 마친 뒷풀이 자리에서 또 제작사 대표 일행을 만나 합석하지만 문소리는 도무지 즐겁지 않다. 초면인 중년 남성들은 배우 문소리가 쌓아 온 연기 경력과 작품들을 너무도 쉽게 평가하고, 끊임없이 그의 외모를 비교·지적하며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친구는 나름의 방식대로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 될 수 있다면서 문소리를 위로하지만, 이미 배역이 없는 현실을 뼈저리게 체감하는 문소리에게는 그마저 화를 돋운다.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배우 문소리 역을 맡고, 연출을 담당한 문소리 감독. (사진=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스틸컷)

     

    영화 속에서 문소리는 여배우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대중의 시선과 '아름다움'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지점들을 어떤 속임수도 없이 폭로한다. 여성 배우들이 유독 외적 평가에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결국 그들을 바라보는 가혹한 사회의 잣대와 기준에 달려있다.

    2막의 문소리는 자신의 유명세로 가족들의 편의를 돌보고, 육아에 지친 일상을 보낸다. 문소리니까 좀 더 이자를 싸게 해주는 대부업체와 어머니 임플란트를 위해 치과의사와 사진을 찍어주는 것 역시 그의 삶을 차지하는 주요한 일과다. 연기만 하면 될 것 같았던 배우 생활은 그에게 녹록지 않은 짐으로 돌아온다. 작품이나 연기가 '주'가 아닌 금전적 가치로 환산되는 자신의 '유명세'로 평가 받는 것. 일이 없는 상황에서 계속되는 육아 스트레스 역시 그를 폭주하게 만든다.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배우 문소리 역을 맡고, 연출을 담당한 문소리 감독. (사진=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스틸컷)

     

    3막에 들어와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과거 문소리와 작품을 함께했지만 흥행에 실패한 감독이 죽음을 맞이하고, 문소리는 썰렁한 장례식장에 동료와 앉아 영화와 예술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그는 죽은 감독이 만들었던 영화들이 '예술'이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배우에게 잘해주는 감독이 좋은 감독이 아니라, 작품을 잘 만드는 감독이 좋은 감독이라고 일갈한다. 그러나 감독의 어린 아들과 함께 감독이 가족들을 촬영한 홈비디오를 보다가 문소리는 별안간 눈물을 쏟는다. 배역이 없어 발버둥 치는 자신도, 흥행 영화를 만들지 못한 감독도 결국 미친 듯이 영화를 사랑했던 인간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순간이다.

    문소리는 이 모든 일상적 이야기들을 블랙코미디 형식을 이용해 감각적으로 풀어냈다. 여배우 삶의 일면을 노골적으로 펼쳐놓아도 아무런 거부감도 들지 않는 것은 이 영화 속에 현실을 비트는 풍자와 해학이 녹아 있는 탓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 여배우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편견을 비판하거나, 여배우가 할 배역이 없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다만 평생을 여성 배우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으로서 이 땅의 여배우들이 걸어 온, 고충 가득한 삶의 단면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할 뿐이다. 한국 영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문소리라는 배우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감독인 자신의 능력으로 현실화시킨 것 자체가 커다란 용기와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평생을 영화인으로 살아온 그가 18년 간 겪고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건 내면의 속살을 내보이는 행위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가볍고 웃긴 그의 화법이 묵직하게 와 닿는 것은 결국 이런 진정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배우의 일상을 거침없이 담아낸 문소리 감독은 첫 작품으로 여배우를 떠나 현대 여성의 삶까지도 아우르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그 연출력을 증명해냈다. 아직 감독으로서 차기작 계획은 없지만, 영화인 문소리가 배우로 혹은 감독으로 영화사에 계속 남길 발자국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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