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양승태 대법원장이 자신의 42년 법관 생활을 '온몸과 마음이 상처에 싸여있는 고목'에 비유하며 22일 퇴임했다.
양 대법원장은 이날 퇴임사에서 '고목 소리'라는 시를 인용해 "고목에는 이파리도 몇 개 없고 줄기도 볼품없지마는 모진 풍상을 견뎌온 흔적에서 숙연한 연륜의 향기가 풍겨온다"며 "고목 같은 법관이 될 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과 행복으로 여기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양 대법원장은 재임 시절 평생법관제 정비와 사실심 강화 추진 등의 성과를 냈지만, 대법원장 권한을 비대화하고 사법부 관료화를 부추겼다는 지적을 받았다. 대법관의 구성 다양화에 실패했다는 평가도 듣는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가 임기 말 터졌고,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추가조사를 거부하면서 일선 판사들로부터 강한 비판도 받았다.
현직 부장판사 뇌물수수 사건으로 지난해 9월 대국민 사과도 했다.
양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행정을 총괄하는 일은 단 하루도 마음 놓을 수 없는 가시밭길이었던 것 같다"며 "국민의 신뢰 증인이 마지막 소명이라는 각오였다. 예기치 않은 일로 법원에 따가운 시선이 쏟아질 때에는 공든 탑이 무너지는 듯한 허탈감을 겪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우리 사회의 상충하는 가치관 사이의 대립과 갈등, 진영논리의 병폐에 대해서는 "사법부가 당면한 큰 위기이자 재판의 독립이라는 헌법의 기본원칙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고 진단했다.
양 대법원장은 "재판 결과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다르기만 하면 극언을 마다 않는 도를 넘은 비난이 다반사로 일고 있고 폭력에 가까운 집단적인 공격조차 빈발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또 "정치적인 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어렵사리 이뤄낸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음은 양 대법원장 퇴임사 전문
[양승태 대법원장 퇴임사] |
존경하는 대법관님들과 각급 법원 원장님들, 그리고 모든 법원 가족 여러분과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저를 축하하기 위해 바쁘신 중에도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법관으로 임용된 날이 1975년 11월 1일이니 오늘까지 법관으로 거의 마흔 두 해를 재직해 온 셈입니다. 저에게 있어 법관의 직은 실로 제 인생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올해로 69년이 된 사법헌정사의 3분의 2에 가까운 기간을 사법부에 몸담아 애환을 같이해 온 산 목격자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수난과 혼란, 기대와 희망이 물결치던 우리나라의 현대사 안에서 의분과 보람, 좌절과 긍지, 실망과 기대가 교차하는 순간순간을 빠짐없이 겪어왔고, 임용 당시 500여 명에 불과하던 법관의 수가 무려 3,000명 수준으로 늘어나는 등 엄청난 성장과 변화를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법관의 길은 명예와 영광으로 포장된 길이지만 그 이면에는 엄한 도덕률이 지배하고, 절제와 희생 그리고 성찰과 격무로 점철되는 험난한 길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법관의 직을 영구히 떠나게 되는 오늘 이 자리를 빌려 그동안 저를 아끼고 도와주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제약된 생활 속에서 묵묵히 저를 이해하며 따라준 제 처와 가족에게도 무한한 사랑과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친애하는 귀빈 여러분, 그리고 법원 가족 여러분!
법관으로서 마지막 단계에서 저는 뜻하지 않게 벅차고 힘든 대법원장의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국가 권력의 한 축인 사법부의 행정을 총괄하는 일은 단 하루도 마음 놓을 수 없는 가시밭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오랜 법관 생활에서 국민의 신뢰야말로 사법부의 유일한 존립 기반임을 확신하고 있었고,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국민에게 다가가 신뢰를 획득하는 것은 모든 법원구성원들의 기본적 의무라고 생각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민의 신뢰 증진이 대법원장인 저에게 주어진 법관으로서의 마지막 소명이라는 각오 아래 그 방향으로 모든 사법정책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적극적이고 대대적인 국민과의 교류를 통해 법원과 재판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근거 없는 의혹을 불식하는 소통의 장을 마련한 것도, 한 번 법관이 되면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고 평생 법관으로서 국민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인사 관행을 정비한 것도, 사실심의 심리절차를 강화하고 1심 재판의 권위와 신뢰성이 무분별하게 훼손되지 않도록 심급제도 운영의 개선을 시도한 것도 모두 국민의 신뢰 확보를 향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한 노력에 대한 국민의 따뜻한 격려가 들려오거나 가시적인 결실을 맺었을 때 뿌듯한 보람을 느끼기도 하였고, 예기치 않은 일로 법원에 따가운 시선이 쏟아질 때에는 공든 탑이 무너지는 듯한 허탈감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공과에 대하여는 후일에 평가가 있겠지만, 국민의 신뢰는 스스로를 희생하며 국민을 섬기려는 진정한 마음이 표출됨이 없이 정책이나 제도의 개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법원 가족이 간절한 염원을 합쳐 진정성 있게 이를 추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6년 전 대법원장 취임사에서‘법원의 개혁은 법관에 대한 존경과 신뢰 없이는 사법부의 미래도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의식의 개혁과 성찰이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신뢰 확보를 위한 노력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속되어야 할 것이니 장차 법관의 의식 개혁이 그러한 노력과 보조를 같이함으로써 결실의 꽃이 활짝 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존경하는 내외 귀빈과 법원 가족 여러분!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한 가치관이 조화롭고 평화로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는 상충하는 가치관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갈수록 격화되어 거의 위험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봅니다. 모든 사람을 우리 편 아니면 상대편으로 일률적으로 줄 세워 재단하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만연하고, 자신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강변하면서 다른 쪽의 논리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진영논리의 병폐가 사회 곳곳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릇된 풍조로 인하여, 재판 결과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다르기만 하면 극언을 마다 않는 도를 넘은 비난이 다반사로 일고 있고 폭력에 가까운 집단적인 공격조차 빈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법부가 당면한 큰 위기이자 재판의 독립이라는 헌법의 기본원칙에 대한 중대한 위협입니다. 우리의 사법체계는 사법부의 독립이 민주체제를 유지하는 데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지를 역대 헌정사를 통해 절실히 인식하고 만들어낸 역사와 경험의 산물입니다. 오랜 역사적 교훈을 통해 이룩한 사법체계의 근간이 흔들리거나 정치적인 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어렵사리 이루어낸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말 것입니다.
헌법이 선언하고 있는 법관독립의 원칙은 법관을 위한 제도가 아닙니다. 법관에게 특혜나 특권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법관독립의 원칙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제도로서, 법관에게는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의 독립을 지켜야 할 헌법적인 의무와 책임이 있을 따름입니다. 법관이 이러한 헌법적 책무를 깊이 인식하고 법의 정신에 따른 슬기로운 균형감각과 의연한 기개로써 지혜와 희생정신을 발휘할 때 사법은 비로소 국민의 굳건한 신뢰 위에 서서 그 소중한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내외 귀빈과 법원 가족 여러분!
제가 존경하는 어느 시인은 ‘고목 소리 들으려면’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 소리 들으려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매 맞은 자국들도 남아 있어야 오래 되었다고 다 고목이 아닌 모양입니다. 고목에는 이파리도 몇 개 없고 줄기도 볼품없지마는 모진 풍상을 견뎌온 흔적에서 숙연한 연륜의 향기가 풍겨옵니다. 저는 제가 그저 오래된 법관에 그치지 않고 온 몸과 마음이 상처에 싸여있는 고목 같은 법관이 될 수 있다면 더 없는 영광과 행복으로 여기겠습니다. 이제 몸은 떠나겠지만 멀리서 옛 둥지를 바라보며 법원 가족 여러분과 마음을 같이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앞날에 항상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하면서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7. 9. 22.
대법원장 양 승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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